우리 정치에는 되풀이가 많다. 예를 들면 4년 전 제15대 총선이 있은 지 1주일만에,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김대중(金大中) 국민회의 총재가 만났다. 초점은 총선 뒤의 여소야대 정국관리였다.그때 대화록을 보면 김총재는 “여소야대를 인위적으로 개편해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있다. 김대통령은 “현재를 여소야대로 볼 수는 없다”고 말을 받았다. 여당 계열의 무소속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래도 신문들은 회담이 원만한 정국운영의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회담 뒤 정국은 지금 말하기조차 민망한 꼴이 되었다. 거센 사정(司正)바람 속에 정부여당은 39일만에 여소야대 판세를 뒤집었다. 15대 국회는 법정기일(6월5일)을 한 달이나 넘기고야 겨우 개원하는 파행을 겪었다.
2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이틀 뒤에도 영수회담이 있었다. 대여(大與)에서 대야(大野)로 변신한 한나라당 조 순(趙 淳) 총재와의 만남이었다. 현안은 김종필(金鍾泌) 총리의 임명동의 문제였으나, 처지가 바뀐 김대통령은 2년 전에 했던 말을 되돌려 받아야 했다. 조총재는 “야당의원 빼가기를 말아야 한다”고 못박았고, 김대통령은 “의원을 빼낼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회담 뒤 정국은 2년 전보다 더 꼬였다. 세풍(稅風) 총풍(銃風)과 방탄국회가 거듭되는 가운데 여당은 집권 2개월만에 여소야대를 역전시켰다. 총리의 임명동의는 반년을 끌었고 15대 국회는 2개월 동안이나 후반기 원 구성을 못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렇다면 지난 4·24 김대중-이회창 회담은 어떨까.
회담 자체의 성과는 어떠했든, 한 달이 지난 지금의 형편은 딱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이한동(李漢東) 총리라는 변수가 등장했고, 총선 40일만에 여소야대 판세가 뒤집어졌다. 4년 전과 2년 전을 아우른 듯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다.
이같은 되풀이의 궤적을 보면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몇 가지다.
하나는 그 되풀이가 빚어낸 후과(後果)의 심각함이다. 4년 전 정국경색은 IMF사태의 한 원인이 되었다. 2년 전의 여야 대립은 새 정부 개혁정책의 추력(推力)을 반감시켰다. 이제 또다시 정국경색이 빚어진다면, 그것이 이 정부의 레임덕현상을 앞당길 것이 틀림없다.
다음은 냉전외교(冷戰外交)를 닮은 여야 영수회담의 되풀이는 정국풀이의 정도(正道)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역시 정치개혁은 밑으로부터 쌓아올려야 한다.
끝으로 ‘회담 후 사태악화’의 원인 제공자는 언제나 정부여당이었다. 그 빌미는 이른바 국회 안의 다수파(多數派)의 공작이었고, 이에 반발하는 야당을 사탕발림하는 것이 사태수습의 해법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16대 국회 개원정국의 전망도 뻔할 것 같으나, 사태수습 책임의 큰 부분이 정부여당 몫인 것 또한 분명하다. 아울러 야당의 현명한 대응을 주문하고, 여야 이견(異見)을 모두 국회 안으로 수렴하여 순리(順理)와 법리(法理)를 좇아 해결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명심할 것은 지난 총선결과는 정쟁(政爭)에 지친 국민들이 그려준 정국해법의 밑그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정국경색 우려를 더는 데는 정치 기교가 아닌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런 근본적인 방안 중의 하나는 대통령이 정쟁에서 초연한 자리를 굳히는 것이다. 그 요체는 4년 전 영수회담의 대화록에서 찾을 수가 있다. 다음은, 그때 김대중 총재의 말이다.
“거당적인 여야 협력체제를 위하여는 대통령의 당적(黨籍) 이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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