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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민 부상땐 눈물이 왈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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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민 부상땐 눈물이 왈칵"

입력
2000.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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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콕 대부' 김학석 배드민턴협회 부회장 인터뷰눈부신 만개에는 숨은 땀이 있게 마련이다. 토양이 척박할 수록 개간하는 노력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올림픽의 금메달 효자종목이면서도 여전히 비인기종목의 그늘에 가려 있는 한국배드민턴.

무관심속에서도 오늘날 세계강국으로 군림하기까지에는 40년 세월을 열정하나로 묵묵히 걸어온, ‘외길인생’이 밑거름이 됐다.

‘셔틀콕의 대부’로 불리는 김학석(52)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 ‘한국 배드민턴사는 김학석이란 이름 석자를 빼 놓고는 쓸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지금도 지구촌 구석구석을 다니며 선수단을 뒷바라지하고 한국배드민턴 위상을 높이기 위한 스포츠외교를 펴는 등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세계남녀단체선수권대회를 마치고 22일 귀국한 그를 만났다.

-배드민턴과 인연을 맺은 지 40년이 되었습니다. 감회가 새로울텐데요.

“남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때문에 즐겁지 않느냐고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많은 기억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족의 희생이 가장 마음에 걸립니다. 식구들의 이해가 없었다면 아마 중간에 포기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후회는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배드민턴을 하겠느냐는 질문에는 그러나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시사로 보였다)

-한국배드민턴이 외국에선 칙사대접을 받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아직도 비인기종목의 꼬리표가 붙어다닙니다.

“국내 스포츠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동안 코리아오픈도 창설하고 슈퍼시리즈도 만드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반응은 여전히 덤덤한 편입니다. 그래도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면서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고 생활체육으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 것에 위안을 가집니다.”

-부친이 한때 이천(경기) 땅의 상당부분을 소유할 정도로, 김부회장은 이천 유지의 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배드민턴 초창기시절 김부회장은 많은 사재를 쏟아부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협회재정이 35억원으로 체육회산하 47개 가맹단체중 재정규모면에서 3위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300만원도 채 안됐습니다. 아들이 배드민턴을 한다니까 아버님(김관식씨)이 협회 부회장직을 맡으면서까지 적극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김부회장의 자택은 선수들의 숙소와 배드민턴인들의 모임처로 이용돼 가족끼리 오붓하게 보낸 날이 거의 없다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하던데요.

“대학시절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기존멤버들과 함께 공군에 입대해 팀을 창설했는데 당시 군에서는 운동팀을 위한 예산이 따로 없었기때문에 모두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배드민턴을 계속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쑥스러운 얘기입니다만 80년에 결혼했을 때 그 주에도 한 고교팀의 선수들이 집에서 숙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채은경씨)는 ‘배드민턴에 미친 사람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신혼시절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딴청을 부리고 넘어간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 가끔씩 ‘조강지처는 배드민턴이고 나는 세컨드’라며 불평아닌 투정을 하면서도 뒷바라지를 잘 해주었습니다. 잦은 출장으로 일년에 집에 머무는 기간이 2∼3개월에 불과해 때때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부회장은 한국배드민턴의 역사를 직접 써 온 산 증인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무었입니까.

“77년도 일본에서 열린 세계남녀단체선수권대회에 출전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만해도 우리의 전력이 약해 기량도 키우고 세계무대에 대한 경험도 축적하기 위해 강국이었던 일본에게 국가대항전을 제의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한마디로 거절하더군요.

화가 치밀었지만 꾹참고 ‘10년내에 너희들을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고 결심했지요. 결국 5년만에 추월했습니다. 일본은 우리와 격차가 벌어지자 82년에 일본측 관계자가 한국으로와 국가대항전을 역제의를 하더군요. 상당히 통쾌했습니다.

그리고 81년 황선애가 가장 권위있는 대회인 전영오픈 여자단식에서 우승하고, 85년 세계선수권대회서 박주봉 김문수가 남자복식 정상에 올랐을 때도 잊을 수 없가 없습니다. 특히 85년도는 우리가 비로소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시기였습니다.”

-지도자생활을 할 때에는 악당으로 불릴 정도로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켰다던데요.

“뭐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어쨌든 성격이 조금 급하기는 했습니다.”(하지만 주변의 증언은 ‘평소에는 인정이 많다가도 훈련시간에는 조금만 잘못돼도 야구방망이에 엉덩이를 맡겨야했다’고 전했다)

-4월 전주에서 열린 봄철종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배드민턴의 간판스타 나경민이 부상을 당하자 울었다고 하던데요.

“(처음에는 과장됐다고 시치미를 떼다가 결국 실토했다) 나경민은 시드니올림픽에서 금 2개(혼합·여자복식)까지 바라볼 수 있는 기둥입니다.

경기장에서 부상소식(오른쪽 골반 아래부위)을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덜컥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주변에서 그걸 본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은 것 같습니다. 현재 치료가 잘 진행중이어서 천만다행입니다.”

-‘김학석-최일현-한성귀’의 트로이카는 90년대 한국배드민턴의 중흥기를 주도한 체제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협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최일현(현 삼성전기 남자팀감독)씨가 협회전무, 한성귀(현 삼성전기 여자팀감독)씨는 대표팀감독 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주로 외국으로 나가 활동했고 최전무는 안방에서 내실을 다지면서 꿈나무들을 발굴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한감독은 15년넘게 대표팀을 잡음없이 이끌었지요.”

(김부회장은 스포츠외교에 주력했고, 부산출신인 최전무는 김문수 유상희 길영아 김지현 등 주로 영남권 선수들을 찾아내 조련했으며, 대표팀 최장수 사령팀인 한감독은 전주출신으로 박주봉 김동문 심은정 등 호남지역 인재들을 발굴해 세계정상으로 키우는 등 탄탄한 팀워크를 이뤘다)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협회재정을 100억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되면 자립이 가능합니다. 매년 우리 선수들이 사용하는 라켓사용률로 37만5,000달러, 공단지원금 2억800만원 등이 고정적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형도(삼성전기 사장) 협회장님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어 조마간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재국 기자 jk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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