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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5.18 하루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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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5.18 하루前

입력
2000.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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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한번 잡아 보세”1980년 3월 말경 전두환씨에게 그의 처족 한 사람이 이렇게 부추겼다고 한다. “형님, 이 기회에 형님께서 한번 잡는 겁니다. 박대통령이 하던 선거방식(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선거)으로 하십시오”

그해 4월 초 사단장 한 사람도 전씨에게 이렇게 권했단다. 그러자 전씨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면서“야, 너 정말 최고다!”라고 칭찬을 했다. 이렇게 전하는 한 잡지기사의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전씨의‘한번 잡아보기’ 결심은 국헌문란을 무릅쓰며 5·17과 5·18을 일으킨다. 소위‘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김대중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비롯한 각계 민주인사와 청년·학생들을 구속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중형에 처했다. 집권에 방해되는 주된 세력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해 5월17일밤 우리집에도 계엄사 합수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집안을 수색하고 나를 붙들어 갔다.‘남산’지하실에서 며칠 모자라는 두달 동안 햇볕 한번 못본 채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며‘조사’라는 요식절차를 겪었다. 몇번 뒤바뀐 저들의 각본에 따라 나는‘조연급 피고인’으로 선택되어 그 야만적 연극의 배역으로 끌려 다녔다.

서울구치소로 압송되던 날 나를 감방으로 데리고 가던 교도관이 “개×같은 세상 만나서 큰 고생하시겠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개×같은 세상”이란 상말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군법회의는 그야말로 회의였지 재판은 아니었다. 그리고 서울구치소에서 육군교도소로, 거기서 다시 소년교도소로 감옥 순례를 하던 끝에 일년만에 풀려나왔다. 그 사이에 집고 넘어가야 할 두가지 수수께끼도 있다. 당시 40대 후반의 나를 왜 소년교도소로 보냈을까. 성탄절에 풀려 나가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어찌하여 다음해 불탄일에 석방되었을까.

세월은 가고 역사는 바뀌어‘개×같은 세상’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내란음모라고 뒤집어씌우고 대권놀음에 성공한 자들이 군사반란죄와 내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마침내 사형수가 대통령이 되고 대통령은 사형수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는 참 묘한 것.‘화합’이란 명분으로 그들은 풀려나서 국내외를 활보하고 있다. 5·17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보면 몹시 혼돈스럽고 착잡하다.

5·17사태가 있은 지 꼭 20년이 되는 17일 오후, 그때 묶여갔던‘피고인’들과 가족 그리고 민주화투쟁의 옛 동지들이‘자진 출석’하여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 피고인중에서 ‘수괴’이던 DJ는 이제 대통령이 되었고 그밖에도 많은 분들이 정계, 관계, 문화계 등 각 분야에서 비중있는 인물이 되었다. 작고하신 분들까지 떠올려 본다면 당시 정치군인들의 피고인 ‘인선’이 제법 적중했던 것 같다.‘피고인’들의 개인적인 활동 비중과는 달리 5·17사건 그 자체는 아직도 응분의 자리매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노태우씨의 12·12, 5·18 공소장에서도 5·17사건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그런가 하면 DJ가 집권한 지금에 와서 5·17을 부각시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 흔한 진상 규명 요구도 없다. 그저 사건 관련자료의 수집및 체험수기 간행 정도가 사업 내용으로 정해졌을 뿐이다.

‘불문의 역사’는 언제나 선일까. 관용은 때로 정의에 반할 수도 있다. 막상 민주화가 이룩되고 나니, 그것을 가능케 했던 5·17과 5·18은 오히려 빛 바랜 기념사진처럼 그 의미가 흐려지거나 망각되어 가고 있다.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맹목일 수밖에 없다”는 바이즈첵커 전독일 대통령의 말이나 “옛 사람의 길을 알고 새김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다스린다(執古之道 以御今之有)”고 한 노자의 말씀이 절실히 생각난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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