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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바둑계엔 일본기사가 없다?

입력
2000.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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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린터는 싫다. 우리를 마라토너라 불러다오.”‘현대 바둑의 종주국’ 일본이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히 여기는 이틀짜리 ‘마라톤 바둑’이 한국에 온다. 한국 출신의 조선진9단과 대만 태생 왕밍완(王銘琬)9단이 격돌하는 제55기 혼인보(本因坊) 도전7번기 제1국이 24, 25일 양일간 서울 롯데호텔서 열린다. 일본의 마지막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제한시간 8시간 바둑’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기회다.

일본 메이저 대회의 도전기가 한국에서 열리는 것은 1985년 제9기 기세이(棋聖) 도전7번기 제1국(조치훈9단 대 다케미야마사키(武宮正樹)9단), 1995년 제50기 혼인보 도전7번기 제1국(조치훈9단 대 가토마사오(加藤正夫)9단)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 1939년 창설된 세계 최초의 공식프로기전인 혼인보와는 두번째 인연이다.

이번 도전기는 지난 해 조치훈9단의 혼인보 11연패를 저지하면서 생애 첫 타이틀을 획득, 일약 일본내 ‘서열 3위’로 부상한 조선진9단의 첫 방어전. 1975년 일본에 진출한 중견기사 왕밍완은 도전자 선발리그서 조치훈 류시훈 등을 제치고 처음으로 메이저 기전 도전무대에 섰다. 두 기사간의 통산전적은 4승 1패로 조선진의 일방적 우세. 하지만 왕밍완이 최근 제25기 메이진(名人)전 리그에서 4승1패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데다, 제4회 잉씨배 16강전에선 한국의 ‘바둑황제’조훈현 9단을 제압하는 등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어 결과는 예측불허다.

한국과 대만 출신이 다투는 일본 최고(最古) 기전의 결승전. 게다가 제1국의 대국 장소는 타이틀 보유자의 고향인 한국의 수도 서울. 이번 혼인보 도전기는 ‘해외파’의 각축전장으로 뒤바뀐 일본 바둑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본은 이른바 7대 기전에 대한 공식 서열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매년 타이틀 판도의 변화에 따라 바둑계 서열이 바뀌고, 이에 따라 모든 예우가 달라지는 것이 오랜 전통. 연간 상금이나 타이틀 보유 수에 상관없이 랭킹 1위 타이틀인 기세이 보유자가 무조건 랭킹 1위가 되고 다음에 메이진, 혼인보 순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현재 기세이 보유자인 왕리청(王立誠)9단이 공식서열 1위, 조치훈은 2위(메이진) 조선진은 3위(혼인보)에 랭크돼 있다. 도전기에서 제한시간 8시간 ‘이틀바둑’이 적용되는 3대 메이저 타이틀을 한국과 대만 출신의 해외파가 독식하고 있는 셈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조치훈이 ‘1인 천하’를 구가할 때만 해도 고바야시고이치(小林光一)9단과 요다노리모토(依田紀基)9단 등 몇몇 토종기사들에 의해 2위 다툼이 치열했지만 춘추전국의 혼돈기나 다름없는 요즘엔 그마저 해외파에 완전히 점령당한 형국이다. 48세의 고바야시9단은 7대 기전에서만 타이틀을 3개나 쥐고 있지만 3대 메이저 타이틀에 도전하기엔 너무 노쇠했고, ‘한국기사 킬러’로 국제무대에서 선전하고 있는 요다 9단은 전체 20여개 기전 중 단 한개의 타이틀도 없는 무관(無冠) 상태다. 지난해 다승 1위(61승14패)를 차지한 다카오신지(高尾紳路)6단, 승률 1위(82.1%)인 야마시다게이코(山下敬吾)6단, 야마다기미오(山田規三生)8단 등 차세대 주자들이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긴 하지만 주요 타이틀의 도전권을 넘나드는 한국이나 중국의 신예강호들에 비해선 활약이 덜 두드러진다는 평이다.

이 때문에 일본 기계 내부에서조차 노령화에 따른 ‘일본 바둑 쇠망론’마저 고개를 들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일본은 정상권의 층이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두터운 편이지만 메이저 타이틀 보유자 중에선 30세의 조선진을 제외하면 전원이 40대 노장들인데다 오랫동안 물갈이가 안된 상태”라며 “강력한 신예들에 의해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는 한 중흥을 기대하긴 힘들 것 같다”고 전망했다.

랭킹 기전 보유자 우승상금

1 棋聖 왕리청 3,300만엔

2 名人 조치훈 2,800만엔

3 本因坊 조선진 2,500만엔

4 十段 고바야시고이치 1,080만엔

5 天元 고바야시고이치 1,040만엔

6 王座 왕리청 1,040만엔

7 碁聖 고바야시고이치 640만엔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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