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朴泰俊)총리는 19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만나 사의를 표명했지만 이미 전날 밤 사퇴결심을 굳혔다. 박총리는 18일밤 총리공관으로 찾아온 조영장(趙榮藏)비서실장 등이 여론동향 등을 보고하자 “더이상 대통령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며칠 더 기다려보자는 참모들의 건의에 손을 내저었다.박총리는 이어 밤10시께 한광옥(韓光玉)비서실장에게 전화해 “내일 아침 대통령이 출근하는 대로 뵈었으면 한다”며 일정을 잡아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청와대는 남북정상회담이란 국가적 대사가 있는데다 마땅한 후보도 없어 총리 교체가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박총리는 19일 출근하지 않은 채 총리공관에서 대기하다 한실장으로부터 “대통령께 보고했다”는 연락을 받고 오전9시20분 청와대로 가 “죄송하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이에 앞서 총리실은 물론 박총리 조차 명의신탁 의혹의 발단인 17일 재판건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총리비서실은 “법원판결에 박총리가 조세회피를 위해 부동산 명의신탁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는 기자들의 얘기를 듣고서야 처음 이 사실을 알았고, 박총리는 판결이 있은 지 3시간여가 지난 오후1시가 넘어서야 첫 보고를 받았다.
박총리나 총리실이 “법적 하자가 없는 만큼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판단한 것도 이같은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 박총리는 17일 퇴근해 공관에 있던중 간부들이 찾아와 “사안이 총리의 도덕성문제로 비화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그제서야 당황한듯 부인 정옥자(鄭玉子)씨를 불러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를 좀 들어봅시다”며 역정을 냈다.
정씨도 “조창선(소송당사자)씨가 자기재산도 있는데 모조리 증여세가 부과돼 소송을 내야겠다고 하기에 그런줄 알고 있었을 뿐 관심을 두지않았다”고 말했다. 총리실의 한 간부는 “박총리가 소송건을 미리 알았다면 소송취하 등 사전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비서들이 이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것도 불찰”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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