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 이명래고약 대표이용재(李容載·80·이명래고약 대표)씨는 요즘 일생동안 사랑한 세 남자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
첫번째 남자는 아버지이며 ‘이명래 고약(膏藥)’을 발명한 재래의약의 거두 이명래(李明來·1890-1952)선생. 두번째 남자는 남편으로 헌법 학자겸 정치인이었던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1906-1987)박사이다. 두 사람을 떠나보낸 그는 이제 세번째 남자인 아들 유 종(兪淙·42·지휘자)씨를 위해 살고 있다.
“결혼전 아버지만을 따르고 결혼후 남편만을 섬기며, 사별후 아들을 위해 살았으니 제 80년은 조선여성의 삶, 그대로군요.” 규방의 여인으로만 살아온 듯 말하지만 실은 이씨는 이명래고약을 최초로 기업화한 주인공.
생약성분의 전통치료법을 활용, 살 속에 응고된 농을 신속히 빼내는 발근고라는 독특한 처방으로 만들어진 이명래고약은 선친이 일제때 만들어냈지만 본격적인 제품화는 이씨가 1956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현대식 제약업체 ‘이명래 고약’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종기하면 고약이 유일하고 가장 빠른 치료법이라 전국에서 약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회사로 몰려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이씨는 의사출신의 전문직여성이었다. 고려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여의전을 졸업, 한때 서울 을지로3가에 내과전문인 요안의원을 개업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남편이 헌법연구가 겸 교수, 정치가인 현민이다 보니 내조에 전념해야했고 그만큼 의사로서, ‘명의’의 딸로 지켜야 할 ‘이명래고약’업무는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선친이 개발하신 의약비방으로는 고약뿐 아니라 칠명산(七明散)도 있습니다. 소화제로 탁월한 효험이 있던 것인데 제가 남편의 내조에만 충실하다보니 제품화를 못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제라도 누군가가 계승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이명래고약’은 창업 때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장안에 한번쯤 안써본 이가 없다는 이명래고약이지만 뛰어난 소염제들이 속속 등장하며 지금은 잊혀져가는 상태. “아직도 일부에선 곪았을 때 고약 이상의 특효약이 없다고 해서 광고를 안해도 연간 1억원어치는 팔립니다”고 이씨는 말한다.
낮에는 고약회사 사장으로 일을 하고 밤이면 남편의 유작 정리와 자신의 회고록 집필에 쉴 틈이 없다는 이씨는 “영국에서 활동중인 아들이 예술면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만큼의 족적을 남기는 것이 어미로서 남은 꿈”이라고 웃었다.
장학만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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