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성함을 쓰시오.’초등학교 1,2학년 시험문제가 아니다. 서울 강남 지역 모 고교가 2학년생을 대상으로 이달초 치른 중간고사 국민윤리 과목의 6점짜리 주관식 문제다.
‘외부로부터 물체에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고 운동하던 물체는 등속 직선운동을 계속하는 것은 어떤 물리법칙인가?’중학교 1학년이면 답할 수 있는 이 문제 역시 이 학교 물리2 과목 6점짜리 문항이었다.
고등학교의 ‘성적 부풀리기 출제’가 횡행하고 있다. 지난해 일부 학교의 ‘쉽게 출제하기’가 문제가 돼 교육청이 행정지도에 나섰지만 시정은 고사하고 오히려 확산되는 양상이다. “우리 학교만 손해볼 수 없다”는 경쟁의식에 2002학년도 대입부터 학교생활기록부 반영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2002 새 대입제도가 적용되는 현재 고2와 고1생들은 고3과 달리 학생부 평가를 절대평가로 하고 있다. 특정 과목 점수가 90점 이상이면 무조건 수, 80점 이상이면 무조건 우를 주는 식이다. 물론 여기에 과목별 석차를 같이 표기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평어에서 수를 많이 받으면 진학에 유리하다. 절대점수를 높여 평어를 잘 받도록 해주려는 학교측의 눈물겨운(?) 노력이 바로 성적 부풀리기 시험인 것이다.
대전 D고의 경우 최근 지구과학 시험문제를 사전에 100% 알려주고 시험을 본 것으로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일부 학교에서는 시험중 부정행위를 사실상 방조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뭐하나”“열심히 한 학생과 시험 전날 딱 20분 공부한 학생의 점수가 같이 나오게 됐다”는 등의 항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J고 한모(18)군은 “문제가 너무 쉬워 실수 하나면 100등 정도 등수가 내려간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서울 B고 박모 교사 등 상당수 교사들은 “다른 학교에서는 문제를 쉽게 내는데 왜 우리만 어렵게 내느냐고 학부모가 항의하면 할 말이 없다”며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일부 학교에서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교무회의 자리에서 간부교사가 공공연히 교사들에게 문제를 쉽게 낼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교육당국은 “올해는 성적부풀리기가 없었다”며 눈과 귀를 막고 있다. 교육부 학교정책과 관계자는 “학생부에는 절대평가식 평어(수,우,미,양,가)와 과목별 석차가 같이 기재되기 때문에 성적부풀리기를 한 학교는 자연히 드러날 수 밖에 없다”며 “대학들도 그런 학교는 불이익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교사들은 “과목별 석차를 함께 기재해도 대학들이 이를 일일이 확인해 전형에 반영하리라는 생각은 환상”이라며 “일단 좋은 평어를 받아 가는 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성적부풀리기는 점점 더 확산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종로학원 김용근 평가실장도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학생들의 학력저하를 부추기는 ‘점수 주기용’ 시험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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