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불러도 가슴 저미는 충장로와 금남로, 그리고 전남도청에서 빛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주주의 영웅들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한없는 슬픔과 감동, 그리고 새로운 각오를 갖게 됩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18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 연설의 서두를 이렇게 감상적으로 시작했다. 그만큼 5·18은 김대통령에게 남달랐다. 당시 사형선고를 받았던 야당인사가 20년이 지나 대통령으로 그 자리에 섰다는 역사의 극적 반전은 감상적 연설을 아주 자연스럽게 했다.
그렇다고 ‘슬픔과 감동, 각오’로 압축되는 연설문 서두가 김대통령의 개인적 회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행간에는 ‘5·18’이나 ‘광주’라는 말이 기피대상이 됐던 과도기를 지나 민주주의와 인권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는 역사의 진보가 나타나고 있다.
몇년전만해도 현직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참석하는 게 왠지 미묘했지만, 이제 그런 모습이 당연하게 비쳐지고 감상적 연설이 공감대를 형성할 정도로 5·18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남게된 것이다.
그동안 김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부산 민주공원 개원식을 시작으로 금년 2월 대구의거, 3·15 마산 민주화운동, 4·19 기념식에 연이어 참석, 민주화운동의 위상을 제고하는 노력을 해왔다. 그런 노력의 정점이 5·18 기념식의 참석이었다.
사실 한때 청와대 일각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의 준비일정 때문에 김대통령의 광주 방문에 소극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5·18 20주년인데다 새천년의 첫 기념식이라는 점, 또 “다른 기념식은 다 가면서...”라는 호남의 불만 등을 고려, 김대통령이 현지 기념식에 참석키로 한 것이다.
김대통령은 기념식 연설에서 ‘광주의 비극을 위대한 교훈으로 승화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자’는 주제를 시종일관 제시했다. 김대통령은 “5·18 하루전 군사정권에 연행돼 모진 박해를 받던 중 군부실력자 한사람이 전해준 묵은 신문을 보고 40여일 지나서 광주에서 있었던 천인공노할 참상을 알게됐다”고 회고했다.
김대통령은 “그 때 결심한 것은 그 분(광주희생자)들의 뒤를 따라 정의롭게 죽는 것 뿐이었다”고 말하자 기념식에 참석한 많은 시민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김대통령은 소회를 피력한 후 5·18 묘역의 국립묘지 승격, 희생자들의 유공자 대우, 인권법제정 등 여러 조치들을 밝히고 “5·18 민주화운동을 지역감정 극복과 국민대화합으로 승화하자”고 호소했다.
기념식이 끝난 후 김대통령은 광주 무등파크 호텔에서 5·18 해외지원인사 등과 오찬을 함께 했다. 오찬장으로 가던 중 김대통령은 연도에서 박수로 환영하는 시민들을 보고 차창을 내려 손을 흔들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오찬장에서 국제노동권리재단 사무총장인 패리스 하비목사, 댄 존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대표, 5·18당시 참상을 화면으로 찍어 처음 보도한 힌즈 페터씨 등을 접견하면서 “당신들의 도움이 헛되지 않았다”면서 “앞으로도 세계의 민주화운동에 적극 앞장서달라”고 당부했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