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中출처위장 '北남침說' 정보제공"연세대 국제학연구소 박선원(朴善源)교수가 17일 관련인사들의 증언 등을 근거로 작성한 논문을 통해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한 신군부의 집권과정에서 일본이 측면지원 역할을 했다고 주장, 상당한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문제의 논문은 박교수가 올해 영국 워뤽(Warwick)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한·미·일 삼각동맹안보체제의 정치적 역동성 ; 1979-1980년 한국의 정권교체기에 나타난 일본의 영향력”. 이 가운데 3장 ‘1979년 11월부터 19801년 1월까지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개입’중 일본의 신군부 간접지원에 대한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삼각동맹체제 내에서 동북아 지역의 안정이라는 대외정책 목표를 함께 공유한 미·일 양국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암살을 계기로 한국의 정정불안에 대해 서로 다른 정책으로 반응했다.
미국 카터행정부는 유신정권의 종말을 한국에 민주주의를 심을 기회로 판단, 민선 민간정부 수립이라는 장기적 정책목표를 세웠지만 일본은 한반도의 안정을 최우선 정책목표로 삼았다. 군사력 행사가 불가능했던 일본의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동북아 위기를 억제할 수 있는 ‘박정희식(式)’의 강력한 국가가 시급했다.
◆ 12·12을 전후한 신군부와 일본의 접촉
당시 주한 일본대사 스노베 류죠(須之部龍三)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 불과 이틀만인 1979년 10월28일 육군본부에서 허문도(許文道)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수석공보관을 만났다. 허문도는 스노베에게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가 열린다”고 말했고, 스노베는 이를 즉시 본국에 보고했다.(1999년 7월10일 일본 외무성 고문실 녹취).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대두를 조기 인지한 일본은 박정희 정권과 가장 유사한 강력한 정부의 출현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허화평(許和平)전 의원은 “당시 미국은 기계적으로 접근했지만 일본은 정서적으로 접근했다”고 평가했다.(1999년 6월 21일 인터뷰)
신군부 세력은 스노베에게 12·12 군사쿠데타를 사전 통보하며 일본의 협력을 구했다. 일본대사관 근처 보안사 소속 ‘안전가옥’에서 가진 비공식 접촉에서 허문도는 재차 “전두환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가 열린다”고 강조했고, 전두환은 “머지않아 정승화(鄭昇和)계엄사령관을 체포할 계획”이라고 알렸다. 스노베는 “소란스러운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고 응답했다. (1999년 7월10일 일본 외무성 고문실 녹취).
일견 소극적으로 보이는 스노베의 응답은 실제에 있어서 의미있는 일본의 측면지원으로 외화된다. 12월 25일 스노베는 한국 정권교체 문제에 대한 정책은 (민주주의가 아닌) “안정 유지”라고 보고한다.
◆ 북한남침설 정보제공
일본은 12·12이후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세력에게1980년 5월10일까지 최소 6차례에 걸쳐 북한의 남침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12·12 쿠데타 이후 1980년 1월까지 짧은 기간에 모두 5차례 제보가 이어진 것은 미국과 갈등 국면(“12·12에 대한 미국의 반발이라는 것은 확실히 매우 심했다” 스노베 81년 일본기자간담회 발언)에 있던 신군부의 한국군 장악과 통제, 미국에 대한 발언권 강화를 위한 일본 측의 조치로 보인다. 일본은 정보의 출처를 중국으로 밝힘으로써 미국의 확인을 어렵게 했다.
특히 중요한 제보는 1980년 5월 10일 일본 내각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 에비스 겐이치(惠比壽建一)의 정보였다. 이 제보는 북한이 당시 한국사태를 결정적 시기로 판단해 5월15일~20일에 남침을 ‘결정’했으며, 당시 유고를 방문 중이던 김일성(金日成)이 구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을 만나 남침계획을 의논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육군정보참모부와 미국은 이 제보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지만 전두환은 5월12일 비상국무회의를 소집, 정국안정을 위한 강도높은 조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튿날 주한 미군사령관 존 위컴(John Wickam)에게 특수부대 이동의 정당성과 계엄 확대 및 철저한 통제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에비스 제보에 대해 일본에서는 일본 첩보당국이 중국에 흘려보낸 정보가 중국으로부터 역정보로 일본으로 되돌아와 신빙성있는 중국정보로 포장돼 한국 측에 전달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 정치인 방문 러시
광주 유혈진압과 김대중(金大中)·김종필(金鍾泌)의 구속, 김영삼(金泳三) 가택연금을 자행한 신군부에게 미국과 일본의 지지는 절실한 과제였다. 하지만 미국은 6월13일 경제원조 삭감,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의 공개적인 전두환 비판, 6월 20일 국무성 아태담당차관보 홀부르크의 서울 방문 무기 연기 등 신군부에 극히 비판적인 입장을 계속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5월20일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제대를 졸업한 한국통 마에다(前田)를 특명전권대사로 파견했다. 최규하(崔圭夏)대통령과는 한 차례도 만나지 않은 마에다는 광주 무력진압 다음날인 5월28일 전두환과 회담했다. 6월9일 기우치(木內) 외무성 아시아국장 방한에 이어, 6월 하순에는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 세지마 류조(賴島龍三)가 비공식 특사로 방문했다.
권익현(權翊鉉)은 99년 일본 NHK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세지마가 일본에 안보연계차관을 요청할 것을 전두환에게 조언했다고 밝혔다. “7월 무역불균형 개선을 이유로 방한해 11억 달러의 구매상담을 성립시킨 구매사절단도 같은 맥락”(소노베 인터뷰)이었다. 세지마는 8월초 다시 방한 해 전두환과 신헌법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국민 통합과 경제 활성화 그리고 일본에서의 신정권 이미지 개선에 대해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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