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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산실](19) 연간지 '기호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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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산실](19) 연간지 '기호학 연구'

입력
2000.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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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연구’는 1994년에 결성된 한국기호학회(회장 김치수)의 학회지다. 그 첫 호는 ‘문화와 기호’라는 표제로 95년 5월에 나왔고, 매년 한 차례씩 표제를 달리해서 지금까지 여섯 차례 나왔다. 2호부터 6호까지의 표제는 ‘현대사회와 기호’ ‘삶과 기호’ ‘기호와 해석’ ‘은유와 환유’ ‘언어와 기호’였다. 지금까지 나온 ‘기호학연구’의 표제들 자체가 기호학이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의 넓이를 보여준다. 한국기호학회는 언어학, 문학, 철학, 미학, 커뮤니케이션, 정치학, 신학, 산업디자인 등 널따란 스펙트럼의 전공자 148명을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이론’이 서울 음대 서우석 교수의 손을 거쳐 한국어판을 얻은 것은 지난 85년이지만, 기호학이라는 말이 우리 담론의 공간에 널리 퍼진 것은 한국기호학회의 활동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기호학이라는 말을 전면에 내걸고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문헌은 ‘기호학연구’가 유일하다.기호학은 기호에 대한 학문이다. 기호란 사람의 지식·의지·감정을 어떤 물리 현상의 매개로 드러내는 표현 형식의 하나다. 언어는 대표적인 기호이지만, 교통표지판이나 멜로디에서부터 의상(衣裳)이나 식품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의미화가 가능한 것은 모두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기호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기호학도 그 연원을 억지로 끌어올리려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까지 가 닿을 수 있겠지만, 근대 기호학은 19세기 말 유럽과 미국에서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찰스 샌더스 퍼스에 의해 상호 연관 없이 독립적으로 시작됐다.

소쉬르는 그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기호들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으로서 기호학을 구상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학은 사회심리학의 한 부분을 이루고, 언어학을 그 한 부분으로 포함한다. 퍼스는 기호를 도상(圖像·icon)과 지표(index)와 상징(symbol)으로 나눴다. 도상은 예컨대 스탈린의 초상화와 스탈린의 관계처럼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 기호다. 지표는 예컨대 수은주의 높이와 기온의 관계처럼 인접성을 바탕으로 한 기호다. 상징은 예컨대 ‘사람’이라는 말과 모든 사람, 즉 사람이라는 부류나 사람이라는 일반적 관념의 관계처럼 규약이나 관습에 근거한 기호다. 그러므로 상징은 대체로 언어 기호와 일치하며 가장 중요한 기호다.

소쉬르의 유럽 기호학은 벨기에의 에릭 뷔상스와 아르헨티나 출신의 루이스 프리에토에 의해 계승됐다. 프리에토는 현대 기호학을 ‘커뮤니케이션의 기호학’과 ‘의미작용의 기호학’으로 분류한 뒤 뷔상스와 자신이 추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기호학’이 진정한 기호학이라고 말함으로써, 의미화가 가능한 모든 사회문화 현상을 기호로 간주하는 롤랑 바르트류(類)의 ‘의미작용의 기호학’을 기호학의 본류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최근의 유럽 기호학은 기호의 영역을 커뮤니케이션의 의도가 그다지 또렷하지 않은 영역, 즉 언어로 대표되는 ‘신호(signal)’ 바깥의 문화 영역으로 한껏 넓히고 있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과 의미작용 사이의 경계가 늘 또렷한 것도 아니다. 예컨대 에코의 예술기호학은 커뮤니케이션의 기호학이자 의미작용의 기호학이다.

한편 퍼스의 미국 기호학은 ‘자극-반응’이라는 퍼스의 행동주의적 도식을 견지한 찰스 모리스를 거쳐 시비억에 이르러 동물기호학으로까지 발전했다. 대체로 문화적 기호만을 그 대상으로 삼는 유럽의 기호학에 비해 미국 기호학은 사람과 동물을 싸안는 생물기호학이 된 셈이다. 인간의 동작이나 제스처를 기호로 보는 버드 휘스텔의 ‘동작학(kinesics)’, 사람들 사이의 접촉에서 공간적 또는 시간적 거리를 하나의 기호로 보는 홀의 ‘접근학(proxemics)’ 등 사회기호학도 미국 기호학의 영역이다. 넓은 의미의 문화기호학이나 사회기호학의 입장에 설 경우, 기호학의 대상은 언어나 문학텍스트의 구조만이 아니라 신문기사, 광고, 음악, 회화, 사진, 만화, 영화, 유행, 소비양태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으로 확산될 수 있다.

기호학의 영역은 그만큼 넓다. 그래서 ‘기호학연구’가 다루는 대상도 그만큼 넓다. ‘기호학연구’는 물론 기호학 이론의 탐색에도 힘을 쏟고 있지만, 실제 분석이 풍성하다. 예컨대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에 대한 보도, ‘한보사태’에 대한 보도, 자동차 광고, 윤동주의 시, 앙리 드 몽테를랑의 희곡 ‘산티아고의 나리’의 극공간의 구조 같은 것들이 분석 대상이 되었다. ‘기호학연구’는 그 자체가 현란하고 다양한 의미를 지닌 기호다. 상상력이 풍부한 기호학자라면 ‘기호학연구’를 하나의 기호로 포착해 분석을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창간사

기호학이 새로운 학문으로 자리잡은 지 이제 겨우 한 세대가 지났지만, 그것이 오늘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에 끼친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롭게 등장하는 현대 문명의 여러 현상들을 해석하는 데 그것 없이는 열리지 않는 열쇠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기호학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기호학은 아직 학문적인 연륜이 짧고 유파와 분야에 따라 이론적인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여지가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규범보다는 개성을 추구하고 완성된 것보다는 창의적인 것을 선호하는 포스트모던한 오늘의 문명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쪼록 ‘기호학 연구’가 세계적인 학회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뜻있는 분들의 지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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