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과 타협않는'바보같은 순수'“심지가 굳은 작가”(작가 김정수) “맑고 따뜻한 눈을 가진 작가”(작가 이금림) “타협할 줄 모르는 고집쟁이”(작가 최완규).
대표적인 드라마 작가 세 명은 후배인 작가 한 사람을 이렇게 평했다. 작가 노희경(34)이다.
인터뷰할 때나 사진을 찍을 때 그녀는 내내 수줍어했다. 30대 중반임에도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소녀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는 질기고 질긴 삶의 의지와 진한 사랑이 관통하고 있다. 방송 작가로 명함을 내민 1995년 MBC 베스트극장 ‘세리와 수지’부터 현재 방송중인 KBS ‘바보 같은 사랑’까지 그녀가 토해내는 극본의 대사에는 우회 어법이나 은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직설 그 자체이다.
그녀는 엄청난 시청률을 담보하는 대중적인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 팬들의 사랑은 매우 농도가 짙다. 마니아를 몰고 다니는 드문 극작가다. 그녀가 집필한 드라마가 방송될 때마다 팬들은 PC통신, 잡지 등을 통해 지지와 환호를 보낸다. 또한 그녀가 쓴 드라마는 백상예술대상을 비롯한 각종 상을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노희경은 자기 내부검열이 강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작가다. “봉제 공장을 무대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데 박영한의 ‘우묵배미의 사랑’과 비슷할 것 같아요. 원작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지요.” 원작 없이도 그녀는 한때 봉제공장을 다닌 경험이 있어 극본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묵배미…’ 와 조금이라도 비슷해질까봐. 정직함이다. 그런 마음이 작품에 그대로 드러난다. “감각적인 부분이나 트렌디는 잘 몰라서 못써요. 그리고 극본을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고치는 것은 유연성이 없는데다 체질에 맞지 않구요.”
그녀가 작품을 기획하거나 극본을 쓸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흥미’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리고 주제나 캐릭터를 구상할 때 삶의 냄새가 나느냐를 먼저 생각한다. 이러한 작품에 대한 태도는 그녀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문학을 하고 싶어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진학했다. 졸업후 선배와 함께 마포에서 포장마차를 차렸다. “주인 얼굴이 못생겼어도 음식 맛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돈도 많이 벌었지요. 즐거웠어요.” 그 뒤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여기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슬픔과 아픔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득했다. 노희경은 이 때 참 행복했다고 했다. 그리고 7년 정도 출판사를 다녔다. 이 시기에 만난 다양한 인물군은 그녀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된다.
“내가 왜 방송작가원으로 발길이 향했는지 모르겠어요.” 뚜렷한 목적의식없이 방송작가원을 다녔고, 미군기지 주변의 두 술집 작부의 삶의 여정을 다룬 ‘수지와 세리’로 1995년 MBC 베스트극장 극본 공모에 당선됐다.
곧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부인과 그를 지켜보는 남편, 가족의 아픔을 진솔하게 다뤄 수많은 시청자의 눈시울을 적셨다. 다음 작품 ‘내가 사는 이유’에선 깡패와 작부의 슬픈 사랑을 묘사하는 등 그녀의 작품은 현실 자체이고,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작가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인 것 같습니다. 신에게서 먼저 깨달음을 얻고 이것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그런 매개체 말입니다.” 그녀가 말하는 작가관을 들으며 연상되는 한 가지. 노희경이 프로메테우스 같다는 생각. 인간에게 유용한 불을 건네주고 신들의 미움을 받아 끊임없이 간을 쪼이는 고통을 당하는 프로메테우스.
방송가에는 미리 극본 마감을 해주는 유일한 작가가 노희경이라는 말이 있다. 마감이 늦으면 연기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고생한다는 생각에 빨리 넘긴다고 했다. “전 개미 같아요. 방송을 안할 때에도 극본을 하루에 한 줄이라도 써요.”
방송 작가하면서 얻은 두 가지 보람. 못생기고 키도 작은 아이가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가족에게 준 것과 이기적인 삶의 자세가 겸손해졌다는 점이다.
꿈이 이뤄질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30년 동안 방송작가로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노희경. 인터뷰를 마칠쯤 신문사 문화부로 탤런트 정보석이 다른 인터뷰 때문에 들어왔다. 노희경을 보고는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녀의 드라마를 한번쯤 본 사람이라면 꼭 한번 만나 보고픈 작가가 바로 노희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력
1966년 경남 함양 출생
1988년 서울예술대학 문창과 졸업
1995년‘세리와 수지’(MBC·베스트극장 공모 우수작)
1996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MBC·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
1997년‘내가 사는 이유’(MBC·MBC작가상)
1998년‘거짓말’(KBS·백상예술대상 극본상)
1999년‘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MBC·방송위원회 좋은 프로그램상)
1999년‘슬픈 유혹’(KBS·KBS작가상)
2000년‘바보같은 사랑’(KBS·집필중)
배국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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