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공산권의 폐쇄성을 상징한 용어‘철의 장막(Iron Curtain)’은 윈스턴 처칠의 작품이다. 그의 문학적 재능이 낳은 추상적 표현만은 아니다. 한반도의 동족상잔이 한창이던 1952년, 동서독 경계에 동독이 너비 5km의 접근금지구역과 철조망을 설치한 것을 이른 말이다. 그때까지 전승국의 독일 분할점령은 영구분단의 합의는 없는 잠정조치였고, 국경도 열려 있었다.동독과 점령국 소련은 열린 국경을 넘는 동독 주민들을 막아야 했다. 동독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경봉쇄로 분단이 굳어지는 것을 서방 승전국들이 진정 안타깝게 여긴 흔적은 없다. 독일 주변국은 20세기 들어 두 차례나 유럽의 세력균형을 깬 독일을 분단하는데 이해가 일치했다. 또 나치 독일에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그 패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소련은 분단을 지속시킬 권리를 묵시적으로 인정받았다. 소련의 우월적 권리는 독일 수도 베를린을 둘로 나눠, 그 심장부를 소련이 점령토록 허용한 사실이 대변한다.
결국 ‘철의 장막’은 정치적 상징조작에 뛰어난 처칠의 위선적 조어(造語)였다. 그 즈음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은 “독일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두개의 독일을 원한다”고 공언했다. 이 시니컬한 해학은 정치적 수사들보다 한결 솔직하게 주변국의 정서와 이해를 표현했다. 다만 작가의 순진한 눈이 독일 분단을 넘어 세계와 인류를 둘로 나눈 냉전의 사악한 진면목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뿐이다. 후세 역사가들이 2차대전의 영웅 처칠과, 동서 이념투쟁과 냉전체제 구축에 앞장선 냉전의 투사 처칠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것은 냉전이 인류에 안긴 고통과 폐해가 그만큼 심대한 탓이다.
한반도 분단도 강대국의 이해가 일치한 결과다. 그러나 일찍이 식민지로 전락한 허물 밖에는 역사에 진 죄가 없는 민족이 왜 동족상잔을 겪고, 독일보다 훨씬 공고한 분단을 떠안아야 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전쟁을 도발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이 주범이라는 교과서적 설명은 전쟁의 진정한 연원에 대한 의문을 모두 풀어주지 못한다. 독일같은 원죄가 없는 민족을 영구분단하기 위해 동족상잔이 필요했으리란 가설, 전쟁의 결과는 주변국 모두에 바람직했다는 지적 등에서 민족적 비극의 연원을 속절없이 헤아릴 뿐이다.
자칫 위험한 발상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분단 55년, 전쟁발발 50주년을 앞두고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견고한 철의 장막을 넘어 남쪽 정상이 북녘을 찾는 상징성은 평화 공존 협력 등의 단어로만 치장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막중하다. 하물며 북한특수 효과와 노벨 평화상 기대 따위는 지극히 왜소할 따름이다.
우리는 지금 유례없이 끈질긴 동족간 적대를 풀고, 화해와 통일을 향한 넓은 길로 나설 수 있는가를 가름하는 길목에 섰다. 이런 때, 불행한 과거를 새로이 천착하고 올바로 정리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의 행보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국시(國是)’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체제이념과 전쟁의 연원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햇볕정책아래 잠복했을 뿐이다. 어느 순간, 어디로부터 거센 보수역풍이 불어 닥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만 내딛다보면 안팎의 역풍에 쉽게 주저앉을 수 있다. 김정일의 답방(答訪)을 추진하는 정부는 동독총리가 서독을 첫 방문했을 때 극우파의 시위가 물결쳤던 선례, 그 브란트의 악몽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 사회 인식 깊숙이 자리잡은 철의 장막부터 걷어내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북한도 결국 세계사의 난폭한 흐름에 휘말린 비극적 운명의 동반자다. 그 비극의 뿌리를 바로 보고, 그들을 포용해야만 민족의 불운을 떨칠 수 있다. 우리 내부의 갈등을 덮어둔 채 기대만 부추겨서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고 본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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