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먹고사는 중학 3년생이 됐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부끄럼 반 설레임 반’으로 교문을 두드렸다. 새벽부터 고3아들 밥먹여 학교에 보내고 나면, 나도 정신없이 가방을 챙겨 학교에 간다.단 한 번뿐인 인생. 그 절반 이상을 배움을 갈망하며 방황한 나는 누구였던가. 여자가 많이 배우면 팔자만 드세진다며 부모님은 중학교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독학이라도 해보려고 빌린 책으로 밤새 씨름하기도 했고, 야학에 보내달라고 떼쓰다가 매를 맞기도 했다. 그리고는 공부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책가방 대신 호미를 손에 쥐었다. 한창 공부를 해야할 나이에 생활인이 돼 눈물젖은 빵을 먹으며 인생을 배워갔다.
배우자만은 똑똑한 사람을 선택하리라 다짐하며 만난 이가 지금의 남편. 고생만 하고 자랐으니 시집은 부잣집에 가야한다는 부모님의 결사반대를 뒤로했다. 맨손으로 시작한 결혼생활, 비참했다. 남편이 시골장터로 행상을 떠난 어느날, 주인집 아저씨가 출근하며 ‘옆 방이 굶고 있으니 집단속 잘하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이지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밤이슬이 어깨 위에 설움처럼 내리던 날 밤.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나는 스스로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했다.
먼저 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 급했다. 그 때부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매달렸다. 봉투붙이기부터 구두꿰매기, 뜨개질 등. 그렇게 들풀처럼 살았다. 아이 셋도 모두 집에서 낳았다. 마음놓고 군것질거리 하나 사먹이지 못했고, 옷도 천조각을 얻어다 손수 지어 입혔다. 주위에선 지독하다고들 했다. 늘 노래처럼 ‘저 자식들 가르치려면 돈벌어야 해’하며 억척을 떨었다. 젊음을 바친 부업으로 집도 장만했지만, 몇년 전 몸 왼쪽이 마비된 탓에 그만둬야 했다.
숨가쁜 일상서 벗어나자 오랜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공부에 대한 열망이 솟구쳤다. 더 늦기전에 시작하리라. 마음먹고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맨 끝에 장지동에 있는 정규 중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이 어느 땐데’라며 망설이던 남편은 결국 허락하며 용기까지 북돋워 주었다. “당신은 충분히 학교에 다닐 자격이 있다. 뒤늦은 공부가 마음처럼 쉽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면서.
설레임으로 기다리던 입학식 이틀 전, 병중의 시아버지가 예고도 없이 시골서 올라오셨다. 당신의 뒷일도 처리못하는 분이었다. 이제와서 공부 때문에 부모님한테 소홀하자니 도리가 아니다 싶고, 오랜 세월 기다려온 내 꿈을 포기하자니 억울하기도 했다. 입학식날 아침 묵묵히 시아버지 시중을 드는 내 등을 남편이 떠밀었다. “걱정말고 다녀오라”며. ‘드디어 중학생이 되는구나’하는 기쁨에 입학식을 눈물바람으로 치른 기억이 난다. 찬바람이 맴도는 운동장에 설움을 쏟아놓으며 다시 한 번 뒤돌아봤다. 내일도 너를 마주할 수 있기를….
정말 힘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시아버지가 온갖 세간살이를 한데 쏟아버려 집안은 전쟁터가 돼 있곤 했다. 참으로 억척같이 뛰어다녔다. 내 손을 꼭 잡으며 “아무것도 해준게 없는데 고생시켜 미안하구나”하시던 시아버지는 일년동안 병원치료를 받으시고 건강이 좋아져 다시 둘째 시동생네로 가셨다.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뒤늦게 공부를 하며 가족들에게 왜 소홀함이 없겠는가. 고3 아들은 가끔 내 방문을 열고 “엄마 공부하기 힘드시죠? 좀 쉬었다 해요”라며 너스레를 떨곤 한다. 대학졸업 후 연구소에 나가는 큰 딸,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작은 딸도 학용품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만 하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고등학교, 대학교도 가고야 말 것이다. 나이들어서 배우다 보니 열을 들으면 아홉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마지막 한 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매달리고 또 매달리니 이제는 자신감이 생긴다.
지금도 시가에선 내가 학교에 다니는 걸 모른다. 제사나 명절 때만 되면 책보따리 숨기느라 정신이 없다. 얼마전 시어머니 제사 때였다. 지방을 미리 준비 못해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 남편은 상가집에 다녀오는 바람에 참석할 수 없었고, 중국서 석사학위까지 받은 시동생마저 지방은 써본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백과사전을 뒤져 내가 직접 써보리라 생각하니, 심장까지 떨려왔다. 방문을 꼭 잠그고 써봤지만 손이 떨려서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소주를 거푸 두 잔 마시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신영숙, 너 이거 밖에 안돼? 시동생 동서들이 비웃을까 봐? 빨리 써 봐.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아.’ 6남매의 맏며느리인 내가 많이 배운 사람들 틈에서 마치 물과 기름처럼 살아온 24년, 그 간의 설움은 한순간에 씻겨졌다.
평생 소원을 풀어준, 하늘같은 남편은 1학년 봄소풍 때 나 몰래 가방에 편지를 넣어줘 학교에 화제가 됐다. “봄의 푸르름처럼 걸음마를 막 시작하는 아기처럼, 여기, 가방을 멘 사랑하는 일학년. 딸을 학교에 보내는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나는 한없이 기쁘다오. 일인다역의 생활인으로서 이곳저곳 손길을 줘야하는 고단한 모습을 보노라면, 측은한 마음도 들지만 당신은 용기있는 사람, 작은 승리자요. 이제 아름다운 새 봄에, 당신을 사랑하는 많은 이의 격려속에 긴 마라톤코스를 ‘막’ 출발하였소. 힘든 역경을 딛고 완주하는 날 나는 당신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겠소. 사랑하오. 남편으로부터”
가난해서 배우지 못했던 아픔, 과로로 건강까지 잃었던 시절…, 한으로 얼룩진 일기장은 이제 태워버렸다.
/신영숙·43세·서울 마포구 아현2동
■[우수상 인터뷰] 신영숙씨
영락없는 중학생이다. 교과서를 담은 큼지막한 배낭을 둘러메고 “중간고사기간이어서 밤샘공부를 해야 할 지경”이라는 시험걱정까지. 신영숙(43)씨는 한림실업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신씨는 당선작 ‘나의 이름은 만학도’에서 30년만에 시작한 늦깎이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 신씨는 “뒤늦게 공부하는 아내와 엄마를 이해하고 격려해 주는 남편과 딸 아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서 글을 썼다”고 말했다.
단지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고리타분한 사고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고, 결혼 후에는 가난 때문에 힘겨웠다. 신씨는 밤을 새워 스웨터를 짜며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렸다. 덕분에 집도 장만했지만, 혹사당한 몸이 10년 전쯤 말썽을 부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왼쪽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때 남편이 에어로빅 옷을 사다주며 운동을 권유해, 지금은 불편없을 정도로 좋아졌다고 했다.
신씨는 3년전 중학생이 됐다. 대학에 다니는 두 딸, 그리고 치매 기운이 보이던 시아버지 때문에 주저하는 신씨에게 남편은 바람막이가 돼주었다. 친정오빠의 반대도 남편이 신씨 모르게 무마시켜 주었다. 신씨가 중학교 졸업장을 딴 후 공부를 그만두고 다시 일을 시작하겠다고 하자 남편이 말렸다. ‘대학에 들어갈 아들, 결혼을 앞둔 딸들에 대한 걱정은 이해하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며.
제일 자신있는 과목은 한문. 체육시간도 좋아한다. 신씨의 꿈은 사회체육학과 대학생이 되는 것. 신씨는 “밤 새는 줄 모르고, 몸 아픈 줄 잊고 공부에 빠져들 때가 많다”며 “영어 알파벳과 한자를 깨우치는 재미에, 남 앞에서 당당해지는 자신감에, 늘 행복하다”고 말했다.
/문향란기자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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