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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김진애, 이집은 누구인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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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김진애, 이집은 누구인가 출간

입력
2000.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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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누구인가?김진애 지음

한길사 발행

소설 ‘빨강머리 앤’에서 마리라 아주머니가 앤의 결혼식을 맞아 앤에게 들려주는 얘기. “집은 세가지를 겪을 때 완성된단다…. 탄생, 죽음, 그리고 결혼. 이 집에는 탄생도 한번 있었고, 죽음도 한번 있었지. 이제 결혼식을 치르게 되니, 이 집이 드디어 집으로 완성되는구나.”

먹고 자고, 쉬기만 한다고 집이 그냥 집일까. 아쉽게도 탄생, 죽음, 결혼 등 일상을 뛰어넘는 인간사의 소중한 일들이 현대의 집에선 일어나는 경우가 이젠 드물어졌다.

터줏대감, 성줏대감, 지신, 장독대 신, 대문 신 등은 우리 조상들이 집에 산다고 믿었던 집 신들이다. 때가 되면 술을 뿌리고 떡을 놓으며 고사를 지냈다. 이런 집 신에 대한 신앙은, 무섭고 때로는 고맙기 이를 데 없는 자연에 대한 경외였다. 그들에게 집은 자연과 인간 공동체, 그리고 한 개인이 만나는 상징적 합일의 장소였다.

조상들은 집에 이름도 붙였다. 열화당(悅話堂·지적 친우와 대화를 즐긴다는 뜻). 독락당(獨樂堂·홀로 고고하게 즐긴다는 뜻), 운조루(雲鳥樓·구름 속에 떠가는 새) 등 근사한 이름이 붙은 집은, 집 주인의 성향과 삶의 흔적을 품고 있는 사람살이의 물질적 터전이자 감성적 바탕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에 있어 집은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가? 집은 기계다. 20세기 거장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테제. 그의 말 대로 이제 집은 편리한 도시생활을 위한 효율적 기계와 다름없다. 멋 부린 집이 들어서더라도 판에 박힌 어설픈 장식성의 틀을 벗어나진 못한다. 인간의 진한 자취가 메말라가는 것.

건축가 김진애씨의 ‘이 집은 누구인가’는 집에 살고 있는 당신이 진정 그 집주인인지 묻는다. 집이 사람의 흔적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모든 집이 천편일률적인지 아쉬워하며 저자는 ‘사람사는 집에 대한 열두가지 생각’을 단아한 문체로 풀어간다. 그 속엔 전문건축가로 살아온 저자 자신의 체험과 지식이 포근하게 녹아있다. 책은 잃어버린 ‘집의 감성’을 찾는, 사색의 오솔길과 같다. 그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 집의 추억을 떠올릴지 모른다.

“동선이 짧아 편합니다.” 가장 합리적으로 설계된 집을 고를 때 늘상 듣는 말. 동선(動線)이 가장 짧은 집이 정답으로 찍힌다. 집안에서 움직이는 선을 짧게 할 수록 에너지와 함께 공간도 절약된다. 그러나 이렇게 효율성만 따지는 게 전부인지 따져묻는다. 저자는 미묘한 감성적 움직임을 포함하는 ‘체험동선’이란 말을 쓰며 오히려 체험동선이 긴 집이 좋다고 말한다. 아파트가 직선에 옆으로 가지처럼 뻗은 ‘가지형 동선’이라면 한옥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순환하는 ‘동심원 동선’을 가졌다. 같은 크기라도 한옥의 동선이 세배나 길다. 시청각적으로 은은한 깊이를 가진 한옥이 아파트처럼 폐쇄적이고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에로틱한 집은 어떨까? 최근 호화아파트나 빌라의 판매전략은 ‘마스터 베드롬 존(주인침실 영역)’의 독립에 있다. 그런데 저자에겐 이게 영 탐탁치 않다. 바로크나 로코코 스타일의 화려한 장식이 달린 가구로 채워진 이런 방은 호텔방을 집안에 들여놓은 꼴. 몰개성적이고 통속적 성(性)에 다름 없다. 핑크빛, 우유빛, 금빛 등으로 장식하거나 폐쇄적 공간으로 만든다고 성적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은 아니라며 개성적이고 은근한 성적 상징을 다양하게 꾸미도록 권한다. 빛을 미묘하게 차단하는 거실의 커튼만으로도 성적인 암시를 줄 수 있듯이. 저자는 또한 한쪽 벽이 거울로 된 큰 목욕탕이 좋다고 하고 갓난아기를 방에서 목욕시키는 것도 자연스런 성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질문 하나. “옷이란 가장 에로틱한 상징이다. 집도 옷과 같은 효과를 낼 수는 없을까?”

‘집의 중심은 어딘가’라는 물음도 던진다. 농촌공동체 시절에는 집의 중심은 각각의 가족이 모이는 외부에 있는 방, 즉 ‘마당’이었다. 지금은 TV가 있는 거실이다. 저자는 앞으로는 ‘부엌’이 집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부엌 예찬은 각별하다. 물과 불이 있는 원초적 공간으로 요리라는 예술이 탄생하는 곳, 온갖 종류의 물건이 전시된 곳. 주부들만의 일터가 아니라, 요리를 매개로 온 가족이 만나 사람 사는 여유를 찾는 곳이 부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엌을 모든 가족이 거쳐갈 수 있는 동선상에 두고, 가장 좋은 시설로 만들고, 또 부엌에서도 TV와 컴퓨터가 보이도록 할 것을 권한다.

이 외에도 비빌 구석, 기댈 구석 많은 집. 마술 같은 경이로움이 깃든 집. 나이를 곱게 먹어가는 집. 추억을 만들어가는 집. 이런 저런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따뜻한 동네를 꿈꾼다. 저자에게 집은 결국 사람이다. 집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집의 감성을 다시금 살려내고자 하는 바람으로 지난 5년간 소중하게 매만진 글들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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