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실종자(MIA)는 국군파월사의 최대 의혹이다. 국방부는 전쟁중에는 실종발생을 일체 부인했고, 공식 전사인 ‘파월한국군전쟁사’(1985년)에도 단 한명의 낙오자가 없다고 적었다. 그러나 참전 가족들의 민원이 이어지자 1973년 3월, 92년 2월, 94년 4월22일 수정을 거듭하며 실종 현황을 발표했다.우선 안학수(건설지원단) 하사, 김인식 (주월사) 대위, 박성열(수도사단) 병장 등 3명은 월북됐다. 이같은 사실은 1969년 9월 북한공작원으로 남파된후 귀순한 정모(65)씨가 “안 하사와 박 병장은 1967년 4월 평남 대동면에 위치한 ‘의거자 정치학교’에서, 김 대위는 평양초대소에서 교양을 받았다”고 증언함으로써 알려졌다.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박우식(9사단) 대위와 안상이 병장, 이용선 상병(이상 해병2여단) 등 3명은 전사처리, 김인수(9사단) 상병은 순직 처리됐다. 정준택(주월사)하사는 아직도 수배중이다.
이번에 공개된 미 국방부 문서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단 박 대위와 김 상병에 대한 언급이 없는 대신, 박정완(태권도단) 중위와 조준범(100군수사) 중위에 대한 실종 사실이 추가됐다. 박 중위(태권도 교관)는 1968년 월맹군의 구정대공세때 포로가 됐다 캄보디아 등에서 18개월간 감옥생활을 한 후 이듬해 9월 한국정부의 교섭으로 석방된 것으로 기록됐다.
조 중위는 72년 3월 29일 탈영후 74년 4월13일 복귀한 것으로 처리됐다. 특히 미국측 자료는 대부분 실종자의 실종날짜가 국방부 자료 보다 앞선다. 이는 당시 부대장들이 전쟁중 실종자가 발생하자 처리를 미적거리다 나중에 보고한 때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실종자의 전부일까. 전쟁때 주월한국군사령부 민사심리전처에 근무했던 이윤경(李潤京·56·호치민 거주)씨는 “1971년에만 3-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으나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면서 “특히 나와 이름이 비슷한 이윤종 상병은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연락장교 출신 김모(57)씨는 “당시 북한측이 배포한 선전자료 중에는 박성렬 안학수 외에 김기정 남상욱 등도 귀순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전경수(全京秀) 교수가 1994년 공개한 월맹군측 ‘전황보고’도 재검토 대상이다. 월맹군이 1968년 발간한 보고서에는 ‘3월13일 메콩 삼각주 꼬치에서 260명 승선한 병력수송선 격침’ ‘7월26일 다낭에서 260명 사망, 부상, 체포’ 등이라고 적혀 있어 국군 실종자 발생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시 실종됐던 참전용사들의 실태와 이들의 생존여부 등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동준기자
■[베트남과 따이한] 북한공군 집단묘지 北참전사실을 입증
하노이에서 북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박쟝성(省) 량장현(懸) 탄딘리(里)에는 전쟁당시 사망한 북한 공군의 집단묘지가 있다. 이곳은 베트남전쟁 참전을 부인해온 북한의 월맹군 직접 지원 사실을 입증하는 장소이다.
21일 방문한 묘소는 바로 옆의 베트남인 공동묘지와는 달리 사방이 흰벽으로 둘러쌓인 채 굳게 잠겨 있었다. 량장현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자물쇠를 여는 순간 1,000여평의 대지에 조성된 묘소와 10m 높이의 위령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탑 앞에는 이미 오래된 듯한 화환들과 다 탄 향이 남아있었다.
위령탑 뒤에는 두줄로 북한군 전사자들의 묘 14기가 비문과 함께 가지런히 마련돼 있다. 비문 앞면에는 베트남어로, 뒷면에는 한글로 ‘렬사’라는 칭호아래 출생지 생년월일 사망일이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들은 1965년-68년 사이에 사망한 북한 공군으로, 사망 당시 나이는 19-38세이다.
무덤을 지키는 마이 할머니는 “묘지는 전쟁중이던 1967년 조성됐다”면서 “올해도 남베트남 해방일인 4월 30일 북한 대사관에서 참배하기로 예정돼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곳으로부터 약 7㎞ 떨어진 곳에는 중국군 215명의 집단묘소가 있었으나 1980년대 중국측이 유골을 가져갔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이동준기자
■[베트남과 따이한] 국군주둔지 순례
30여년전 국군이 목숨을 바쳐 지켰던 베트남 1번국도. 청룡부대 주둔지인 최전선 다낭에서 호치민(옛 사이공)에 이르는 1,100㎞의 차선없는 포장도로 주변에는 지금도 ‘따이한’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지난달 23일부터 이틀간 쉼없이 달린 이 길은 과거로의 여행만은 아니었다.
중부도시 후예에서 협곡을 따라 다낭시 쪽으로 100㎞ 가량 가면 갑자기 확트인 바다가 펼쳐진다. 이곳이 ‘귀신잡는 해병대’ 청룡부대의 거점이다.
한 주민은 다낭 시내 초입에 위치한 베트남군 해안경비부대를 가리키며 “청룡의 첨병중대였던 곳”라고 설명한다. 초소를 지키던 베트남군은 ‘지금도 남조띵(남조선)이 만든 막사를 쓰고 있다”면서 머쓱해했다.
다낭에서 호이안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청룡 사령부. 국도에서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1㎞쯤 떨어진 이곳은 이제 잡초마저 없는 황무지가 됐지만 콘크리트로 만든 위병소는 옛 위엄 그대로다.
다낭 남쪽 푸캇에서 갈라지는 19번도로. 맹호는 미군 1개사단이 뚫지 못해 포기한 이 길을 1966년 봄 1개연대가 출동, 평정했다. 이 길을 따라 60㎞ 가량 가면 국군 최대 격전지였던 앙케 638고지가 나온다.
푸캇 외곽에 위치한 맹호1연대 사령부엔 베트남인들의 공동묘지가 들어서고 태극기가 내걸렸던 콘크리트 게양대는 두 동강이 났지만, 맹호의 상징 ‘방패’가 선명하다.(사진3) 맹호가 1966년 5월6일 남중부의 중심 퀴논시 증빙공원에 만든 팔각정에는 베트남인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다. 부대원들이 인근 송카우 튀화 주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줬던 쿠멍 고갯길 주변에 버려진 벙커에 한 참전용사는 ‘大韓(대한)’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따이한을 ‘좋은 사람들’로만 기억하진 않았다. ‘한국사람’을 알아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는 몸서리를 쳤다. 노점상 주인 할머니는 망고 바나나 등 과일을 내놓다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듣곤 인상을 찡그리더니 팔 수 없다고 돌아섰다.
야자수와 백사장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해변이 10㎞ 이상 펼쳐진 나트랑.백마 28, 29연대 등 국군 대부분이 이곳을 통해 상륙, 북상했다. 이곳에 있는 백마부대 전적비는 철조망으로 출입을 통제한 탓인지 아주 잘 보존돼 있다.
지금 나트랑은 군사도시가 아니라 과거의 ‘동양의 나폴리’로 되돌아왔다. 지금은 사범대학으로 바뀐 옛 한국야전군사령부 정문앞에서 노점을 하는 마이(46·여)씨는 “군인들이 식량을 나눠주던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따이한의 상징이던 ‘태권도’를 흉내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베트남과 따이한/특별기고] 미 제공자료는 실체일부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全京秀) 교수
나는 1994년 4월 베트남전쟁 동안의 한국군 포로와 실종자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까지 국방부의 공식기록에는 포로와 실종자가 없었다. “한국군은 모두 귀신만 왔다갔나.”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국방부는 나의 문제제기에 대해 “월남전은 우군지역 내에 침투한 소규모의 적군에 대해 소탕 또는 포위 섬멸하는 대전투 작전의 양상으로서 당시 월남전의 상황과 전술지식을 갖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소규모 적군’과 싸웠는데 미군은 왜 그리 많은 희생이 났고, 한국군은 왜 그리 많이 파병됐는가. 베트남 전쟁 당시 정부주도로 언론에 보도했던 치열한 전투는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국방부의 고위층이 언론에 배포한 내용이 베트남 전쟁을 왜곡된 시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주장에 대해 국방부는 8명의 실종자와 복귀생환 장병 2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그 명단은 내가 이미 발표한 논문에서 제시된 명단과 거의 유사했다. 정부가 뒷북을 친 셈이었다. 그후 한달여간 나는 엄청난 시달림을 받았다. 협박전화와 편지가 연구실과 집으로 날아왔다. 나의 주장이 옳다는 청룡부대 참전용사들의 격려성 전화도 있었다. 익명을 요구하는 제보는 당시의 공포분위기를 반증했다. 유사한 내용은 해외에서도 날아왔다.
당시 나는 진실을 밝힌다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나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의 확보를 위해 미 국방부 산하 ‘포로와 실종자 방어국’(DPMO)의 하노이 사무소에 연락했고, 그곳에서는 미국 워싱턴 DC의 본부와 연락해 ‘정책차원’의 고려를 한 끝에 자료를 보내주었다. 우리의 문제를, 그것도 우리 내부에 있어야만 하는 자료들을 외부로부터 공급받아야 하는 서글픔이 공포감을 능가하는 문제였다.
미군측이 제공한 자료는 실체의 일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주베트남 한국대사관도 알고 있었던 일이다. 당시 국방부도 외무부도 모두 입을 다문 것은 보다 상부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부터라도 사실을 밝히기 위한 실태조사가 실시돼야 한다. 군인에 대해서는 국방부가, 민간인에 대해서는 외교통상부가 나서야 할 일이다. 그 과정에서 사후처리가 잘못된 부분이 밝혀진다면, 범정부적으로 신속하게 사실을 바로잡고 뒷처리를 해야 한다.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진실을 국민에게 공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위한 노력이 있기를 바란다. 낯선 땅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하는 행사도 뒤이어지길 간곡하게 고대한다. 국가와 국민의 의미는 이러한 과정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