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살아왔으니 이젠 보답해야죠"“받은 만큼 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행복하다고 했다. 자신의 삶이 보람된 것이라고 말했다. 남들이 도와줘 이만큼이라도 살아왔다며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순자씨(金順子.60). 키 121㎝의 왜소증 장애인.
그러나 그의 그런 말을 전부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숨기려는 것 같았다. 숨기려는 노력 끝에 거짓말도 하는 것 같았다.
경북 의성군 의성읍 사곡면 치선리, 봄날 오후의 햇볕이 나른하고, 마당 빗질 자국이 선명한 그의 집에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의 속말은 끝내 못 들은 것 같았다.
"살면 뭐하나..." 자살 생각도
그가 태어나 여태껏 살고 있는 치선리는 마을 가운데로 새마을도로가 뚫려 있고 길 양쪽 논밭 사이에 50여 가구의 농가가 들어서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늘이 주산품이며 콩과 한약재인 홍화 밭도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다. 마을 뒤편의 산세가 험하다. 몇 겹으로 주름잡힌 소백산맥 줄기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갓 봄을 맞은 푸른색으로 일렁이고 있다.
김씨는 그 봉우리들 사이로 뚫린 수많은 고개이름을 줄줄 외운다. “저기 보이는 건 술음재, 술음재 옆은 토연재, 토연재 옆은 옥박골재, 그 옆은 배골재, 진등재, 보고단재, 놀메재….”봉우리 사이사이에 틀어박힌 마을이름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태어나 평생 살아온 마을 주변 지리를 모두 외우는 건 특별한 능력은 아니다. 특히 농촌사람들에게는. 그러나 그가 고개이름을 손가락 꼽아가며 기억해내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는 스무 살 때부터 그 많은 고개를 하루에 두 개 혹은 세 개씩 넘어 다니며 살아왔다. 그것도 자신의 몸체만 한 가방 두 개를 하나는 이고 하나는 든 채로.
이제 그의 삶을 이야기할 때다. 2남2녀의 둘째 딸로 남동생을 하나 두고 있는 그는 뼈가 약해 세 살 때까지 혼자서는 고개도 들 수 없었으며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은 왜소증 장애자다.
그의 어머니는 “너 가졌을 때 문어를 먹고 싶어 문어를 먹은 게 탈이다. 내가 문어만 안 먹었으면 너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평생 후회했다.
그는 아홉 살 때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 다닐 때 선배 언니들이 귀엽다며 나를 집으로 데려가 같이 놀아주었지요. 키가 작다고 놀리거나 업신여김을 당한 적은 없어요. 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때도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한 채 집에서 놀던 그는 스무살이 되던 해 “밥만 축낸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났다. 다른 친척집을 찾아갔으나 거기서도 박대를 당했다. “밥 한끼도 못 얻어먹는 목숨, 살아서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무에 목을 맸지만 실패했다.
딸이 쫓겨나는 것을 보고도 한 숨밖에 쉴 수 없었던 어머니도 그의 자살 소동에 놀라 집을 나왔다. 쌀 한 되 보리 닷 되를 가지고. 마을의 빈집에 거처를 마련한 모녀의 삶은 이제 그의 책임이 됐다.
쫓겨나기 전 다른 도시의 언니집에 잠깐 머물렀던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미용기술을 배워두었는데 그것이 어머니의 농사기술보다 훨씬 더 삶에 유용했다.
어머니가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져 갈 무렵 그는 마을 아낙들의 머리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아무도 나한테 머리를 맡기려 하지 않았어요. 몸도 성치않은 게 파마를 제대로 할 리가 없다는 거지요. 처음엔 공짜로 한 사람 두 사람 해주다보니까 파마가 잘 됐다는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어났지요.”
■미용기술 배워 돈벌이 시작
그가 머리 일을 시작한 60년대 초반은 산골 아낙들 사이에서도 비녀머리가 사라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가발산업이 국가 주요 수출산업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또 파마를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그들은 앞다퉈 비녀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산골동네에 변변한 미장원이 있을 리도 없고, 대처로 나가자니 비용이 만만치 않은 그들에게 직접 마을을 돌아다니며 싼값에 머리를 해주는 그는 오히려 고마운 존재였다.
그도 신이 났다. “처음에는 종일토록 자르고 파마를 해야하는 날이 매일이었습니다. 어떤 마을에는 여자가 70명이 있었는데 일주일을 꼬박 머무르면서 머리를 해주었지요.” “돈도 많이 벌었어요. 현금으로도 받고 곡식으로도 받았는데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돈을 세는 재미가 정말 좋더라고요.”
이때부터 집안과 마을에서 그의 위치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빈한한 산골마을인지라 언제나 현금이 필요한 이웃이 많았고 그는 이들이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는 상대였다. 야무진 어머니는 이자를 받아 딸이 벌어온 돈을 늘렸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또 논도 사고 밭도 샀다. 어머니가 돈을 불리는 사이 그는 파마약과 파마기구가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이고 이 고개 저 고개를 종종거리며 넘었다. 한 번 집을 나가면 여러 마을을 순회하느라 한 달간 못 돌아올 때도 있었다.
재미만 있었을까. 아니었다. 그의 한 동창생은 “순자가 어느 마을로 들어서다가 ○○이가 지나간다며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옆구리를 맞아 며칠 간 누워있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순자는 밤에 길을 잘못 들어 골짜기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눈이 어른들 키에도 무릎까지 내린 날에는 어머니가 그를 찾아 산길을 헤맸다.
또 고개 마루에 낯 선 사람들이 서있을 것 같으면 그들이 사라지거나 아는 사람들이 올 때까지 고개 아래에서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을 때도 여러 번이었다.
■아이들에게 돌 얻어맞기도
그러나 그는 아이들로부터 돌을 맞은 적도 없고, 골짜기에서 밤을 샌 적도 없다고 말했다. 모든 이들이 전부 잘 대해줬고 그들 때문에 이나마도 살게 됐다고 고마와 했다. 그래서 자신은 행복하고 보람되게 산 것 같다고 거듭 말했다. 자신을 집에서 쫓아낸 가족의 이야기가 알려지는 걸 싫어한 그는 자신을 못살게 괴롭힌 이웃들의 기억도 지워내려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자는 그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을, 남들이 도와줘서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었다는 말을 전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처지의 많은 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장애인에 대한 법과 제도, 시민의식이 지금만큼도 싹트지 않았던 지난 시대를 장애인으로 살아온 그가 ‘행복’‘보람’‘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말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요즘엔 일 때문에 고개를 넘지는 않는다. 그 무거운 것들을 들고 높은 고개를 넘기에는 나이가 들었다. 젊을 때 너무 힘을 써서인지 허리도 아프다. 다만 마실가서 머리가 긴 노인들을 보면 무료로 잘라주기도 한다. 그의 말로는 ‘봉사’다. 젊을 때 자신을 도와준 이웃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이다.
■"효도관광은 그냥 봉사일뿐"
그의 봉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관광버스를 열 차례 가까이 대절해 이웃마을 할머니들을 부산 지리산 수안보 등지로 여행을 보냈다.
아직 보답을 제대로 못한 다른 마을 할머니들도 조만간 관광을 시킬 생각이다. 그는 또 옆 마을 경로당 건립에도 돈을 보탰다. 그의 보답을 받은 어느 마을에서는 ‘미용사 김순자여사, 파이팅!’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이 순자’가 ‘김순자여사’로 바뀐 것이다.
그는 얼마나 벌었을까. “논 300평, 밭 300평과 현금이 좀 있지요.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덜 먹고 덜 쓰는 한이 있어도 나를 이나마 살게 해준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으려는 생각입니다.”
그는 18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산다. “혼인 말이 몇 군데서 있기는 있었지요. 그런데 혼자 사는 게 낫지 싶어서 안 했습니다. 애초부터 결혼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옳지도 못한 사람이 자식 낳아서 뭐 할라고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는 대신 조카들 대학 학비를 대왔다. 4명은 그의 도움으로 대학을 무사히 다녔고 군에 간 막내 조카는 곧 제대하면 다시 그의 지원으로 학교를 다니게 된다.
심심풀이로 집 뒤편 밭에서 콩과 고추 마늘을 일구고 있는 그는 요즘들어 아픈 허리때문에 잠을 잘 못 들 때가 많다. 새벽 3시까지 하는 TV를 다 보고도 잠이 안 오면 관광다녀온 할머니들과 조카들이 보내온 선물을 꺼내놓고 보는 게 낙이다.
그는 막내 조카 학교가 끝나면 머리는 좋은데 돈이 없는 학생 하나를 뒷바라지 하고 싶어한다. “내 죽으면 내 이름이라도 기억해주겠지” 하는 생각에서.
편집국 부국장 soongchung@hk.co.kr
■[정숭호가 만난 사람] 초등교동창 차흥봉장관이 말하는 '작은 순자'
"네가 복지부장관하는 게 낫겠다"
지난 해 가을 김순자씨는 자신을 찾아온 차흥봉(車興奉) 보건복지부장관을 만났다. 둘은 장애자 정책의 책임자인 복지부장관과 장애자로 만난 것이 아니라 옛 정을 나누기 위해 만났다. 김씨와 차장관은 의성남부초등학교 6회 동기동창으로 이날 만남은 45년만이었다.
동기동창중 순자가 여러 명이어서 자신의 기억에 ‘작은 순자’로 남아있는 김씨와 헤어지면서 차장관은 “순자야, 너가 나보다 낫다. 너가 복지부장관을 하는게 낫겠다”고 말했다.
이웃과 나누는 김씨의 삶에서 받은 감동이 그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게 만든 것이다. 다음은 김씨의 삶에 대해 차장관이 한국일보로 보내온 글의 일부다.
“작년 가을 고향을 찾은 길에 꼭 보고 싶은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키가 너무 작아서 ‘작은 순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여자동창생이다. 저녁때 읍에서 십여리 쯤 떨어진 시골 마을로 그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동네어귀까지 마중 나온 친구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이 든 얼굴이었지만 옛 모습은 그대로 였다.
나는 그날 ‘작은 순자’가 살아온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러 갈 때 나는 장애인인 그 친구가 틀림없이 못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장애인문제에 관여하면서 차별과 냉대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우리나라 장애인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45년만에 만난 ‘작은 순자’의 모습은 나의 선입관을 훨씬 초월하였다. 장애와 소외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모습이었다. 1988년 잠실운동장에서 개최된 세계장애인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를 들고 메인스타디엄에 들어서는 장애인 선수의 모습을 보고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장애는 생각여하에 따라 무한한 창조와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있고 좌절과 의존의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장애는 이를 극복하고 일어설 때 장애인 자신에게는 인간승리가 되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인간적 감동을 준다.
잎이 피고 꽃이 피며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우리나라 모든 장애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다시 살려 재활·자립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함께 잘 사는 복지국가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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