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상흔을 남긴 민족 최대의 비극인 이 전쟁의 발발배경과 개전과정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상당한 기간동안 여러 의혹과 의문이 있어 왔고 논쟁도 많았다.물론 그동안 이에 대한 논쟁이 너무 가열되고 증폭되면서 전쟁의 전체 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다른 요소, 예컨대 전쟁 전개과정에서의 중요한 이슈들과 전쟁의 실제적 영향 등에 대한 논의가 크게 소홀했다는 의미있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역시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과정은 이 전쟁의 성격을 일차적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한국전쟁은 발발 직후부터 전쟁 발발 책임에 대한 논란에 휩싸였다. 남한은 이 전쟁을 김일성의 불법 전면남침으로 규정했으며, 이승만대통령도 “남한이 (제1차 세계대전을 유발한)‘제2의 사라예보’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함으로써 이 전쟁이 세계 공산주의세력과 서방 영의 대리전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미국 역시 스탈린이 주도한 세계 공산세력의 도발 전초전으로서 이해하고 대응했다. 처음 전쟁 발발 소식을 보고받은 트루만대통령은 이 전쟁을 ‘히틀러의 동유럽 침공과 이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 실패’의 경험에 빗대어 인식했다고 자서전에서 후술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공산측은 전혀 다른 내용을 주장하고 있었다. 북한은 전쟁 발발 당일 내무성 담화를 통해 “남한군의 북침을 격퇴하고 추격전을 진행중”이라고 발표했다. 북한과 공산진영의 공식입장은 한 마디로 이 전쟁이 북한과 공산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미제와 이승만 괴뢰정권의 북침’에서 비롯되어 북한이 그 대응으로서 ‘정의의 민족해방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정에 대해 교전 양측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제시하면서, 주로 서방국가에서 이에 관한 학문적 논란이 점차 일기 시작했다. 특히 양측의 주장이 확증자료를 근거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쌍방의 진격작전시 획득된 일부 문서, 즉 북한군의 정찰명령서라든가 이승만의 서한 등에서 유추된 ‘심증’에 의해 제시된 까닭에 논란의 소지는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전통주의 서방학자들이 주로 제시했던 스탈린의 개전 동기는 소련이 미국과의 전세계적 대결에서 자국의 위신을 제고함과 아울러 유럽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성으로 강화된 미국의 압력을 분산시키는 데 있었으며, 특히 세계적화전략과 관련하여 남한이라는 자본주의진영의 허점을 잡아 미국의 결의를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서방에서는 소련의 압도적 영향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련의 ‘꼭둑각시’인 북한의 개전동기가 덜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중국 역시 개전과정의 역할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다.
전통주의학파의 주장은 점차 수정주의학파의 도전을 받게 된다. 미국의 좌파 언론인인 스톤(I.Stone)은 1952년에 신문 보도 등에 근거하여 전쟁이 이승만과 맥아더, 장개석의 음모에 의해 발발했다는 효시적 반론을 주장했다.
그 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수정주의학자들이 제기한 핵심적 주장 역시 이 전쟁이 주로 남침 유도로 인해 발발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도의 굽타(K. Gupta)와 미국의 콜코 부처(J. & G. Kolko) 등에 의한 이와 같은 주장은 실증자료가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론과 심증에 근거하여 제시된 것으로서 발표 당시부터 반론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에 따라 시몬스(R. Simmons) 등에 의해 이 전쟁이 ‘내전’이라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 후 미국 외교문서 등 관련자료의 공개에 의해 한국전쟁의 발발이 북한의 계획된 남침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점차 분명해지면서, 수정주의자들의 논의는 전쟁의 발발보다 그 전쟁이 어떤 배경 하에 발발하게 되었는가, 즉 전쟁의 기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80년대초 커밍스(B. Cumings)는 해방 이전부터 응축되어온 사회개혁의 열망이 미군정과 분단과정을 거치면서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결과, 사회개혁에 관해 ‘반동적’인 남한정부와 ‘진보적’인 북한정부 사이의 갈등이 결국 전쟁으로 비화되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그의 전쟁기원론은 미국의 방대한 비밀해제 공문서와 더불어 남북한의 각종 자료를 재구성한 것으로서, 80년대 남한에서의 반미주의 및 비판적 사고와 맞물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들 일련의 수정주의 논의는 당초부터 이념적 편향성에 입각하여 주로 미국측 정책자료를 ‘선별’하여 분석함으로써 전쟁의 원인에 대한 한·미측의 책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는 역으로 공산측의 새로운 자료들이 공개될 경우에 그 배경부터 뒤흔들릴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 전 소련총리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나 평양주둔군 출신 칼리노프(K.Jalinov), ‘민주조선’의 전 주필 한재덕 등의 증언, 그리고 탈냉전 이후에는 북한군 부총참모장이었던 이상조, 북한군 작전국장이던 유성철 등의 증언을 통해 김일성 주도와 스탈린 동의 하의 전면 남침사실이 폭로되어 왔다.
특히 94년에는 구소련 외교문서가 남한정부에 정식으로 제공되면서, 전쟁준비 과정에서 50년초에 김일성과 스탈린, 그리고 김일성과 마오쩌둥(毛澤東)의 회담이 있었고 여기에서 개전이 결정되었으며, 이미 49년부터 상당한 규모의 대북 군사지원이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확인되었다.
이처럼 탈냉전 이후 변화된 자료환경의 결과, 한국전쟁의 발발과정에서의 소련과 북한의 역할에 대한 재강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이 전쟁은 “한반도의 사회주의 통일을 군사적으로 달성하겠다는 김일성의 의지를 세계 적화와 자국 세력권 확장을 위해 스탈린이 동의하고 모택동이 추인함으로써 시작된 전쟁”이다.
물론 아직 구소련의 자료가 모두 밝혀진 것도 아니고 중국이나 북한측 자료도 대부분 미공개인 상태에서 이제까지의 연구결과가 완결적인 것이라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이상의 개전 결정 과정에 비추어 전쟁의 기원에 대한 여러 논의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불가피’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서주석
■김일성과 중·소와의 개전 관련 회담기록
(출처: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
북한이 절대적 대남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 남한에는 아직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미·소는 38선 분할의 합의자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대남 군사공세는 남한에 의해 야기된 침략을 격퇴하는 경우에만 허용된다. (1949년 3월5일, 스탈린이 김일성·박헌영에게 제시한 의견)
중·소동맹조약 체결과 소련의 원자탄 보유로 미국의 입장이 변화됐을 지 모르나 미국의 개입 여부를 재검토해야 한다(김일성은 ‘미국 불개입’의견 제시). ‘통일과업’개시에 일단 동의하나 최종적 결정은 중·북간에 이루어져야 하며 중국의 의견이 부정적이라면 새 협의시까지 결정이 연기된다. (1950년 4월, 스탈린이 김일성·박헌영에게 제시한 의견)
북한이 ‘군사력 증강, 대남 평화통일 제의, 남한의 평화 거부후 전투개시’의 3단계 전쟁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데 대해 동의한다.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후에 대남작전을 개시한다면 중국은 충분히 도울 수 있다(1950년 5월14일, 마오쩌둥이 김일성·박헌영에게 제시한 내용).
■6·25개전에 관한 북한의 최근 주장과 평가
북한은 현재도 미국과 남한의 ‘공모’에 의한 ‘북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노동신문’에서 매년 6·25를 전후하여 항상 제시하고 있는 주장의 핵심적 내용이다.
①미국은 ‘알3’와 ‘엔.에쓰.씨68’이라는 전쟁계획에 따라 남한군, 미군, 일본군이 전면 동원되는 개전 시기를 1950년으로 미리 정했다.
②이 계획에 따라 미국 정보기관은 38선에서의 군사적 징후에 대한 평가를 의도적으로 배제했고, 국무부도 유엔 안보리에 상정할 결의안을 개전 이전에 이미 마련하고 있었다.
③미국의 전쟁계획과 이에 따른 북침은 1950년 6월 덜레스의 남한 방문 당시의 연설, 미국기자의 증언, 일부 남한군 출신 포로의 증언 등에 의해 확인된다.
북한의 주장은 탈냉전 이후에 나온 자료들을 일절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추측과 왜곡이 곳곳에 보인다.
먼저 R3 전쟁계획은 실체가 없는 가설적 주장이며, 1970년대에 공개된 NSC 68은 소련의 원폭 개발 등 안보상황 변화에 따른 미국의 전략적 대응을 검토한 국가안보회의 문서로 1950년 4월에 일단 검토후 보류됐다.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 누락은 매일 수백 건의 정보보고가 있고 여기에는 북한군의 남침 임박 징후에 대한 보고가 많았던 것으로 추후 확인됐다는 점에서 북침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기보다 오히려 ‘남침’을 예견하지 못한 정보 판단상의 실수로 해석되고 있다.
미 국무부의 결의안은 개전 가능지역에 대한 비상계획 상의 사전 대비 또는 전쟁 발발후 즉시 작성된 문안(전체가 10줄 남짓에 불과)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밖의 여러 증언과 방증 역시 대부분 억측과 더불어 사전·사후의 의도적 왜곡의 결과이다. 현재는 러시아와 중국 모두 북한에 의한 남침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 다음은 5월1일(월)자에 ‘북한의 개전 목표와 서울 점령’
한국일보·한국정치외교사학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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