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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산실](15) 계간지 '문화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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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산실](15) 계간지 '문화과학'

입력
2000.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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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문화과학’은 1992년 여름호로 창간됐다. 그간 몇 차례 결호가 있어서, ‘어린이’를 특집의 주제로 삼은 올 봄호는 21호다. ‘문화과학’이 창간된 92년은 이른바 ‘몰락 이후’의 상황이다. 그 몰락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했다고 해서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함께 몰락한 것은 아니다.물론 왜곡된 형태로나마 현실 사회주의를 이론적으로 떠받치고 있던 것이 마르크스주의였으므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함께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세력의 쇠퇴를 겪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물질적 기초와 함께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다. 그 시기에 좌파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갱신’ 또는 ‘전화(轉化)’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나오지 않고 있지만 그 즈음에 창간된 ‘이론’과 함께, ‘문화과학’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갱신 내지 전화를 모색하던 이른바 PD계열 좌파의 둥지였다고 할 수 있다.

창간호에 실린 좌담 ‘현단계 자본주의 문화현실과 과학적 문화이론의 모색’이나, ‘과학적 문화론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특집 안에 묶인 발행인 강내희(중앙대 교수)씨의 논문 ‘유물론적 문화론 정초를 위하여’는 그 제목에서부터 이 잡지가 마르크스주의 문화 이론의 탐색과 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어법으로 ‘과학적’ ‘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적’은 거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편집위원들도 창간사에서 “관념론으로 가동되는 부르주아 문화 이론이 진보적 문화이론 진영 일부에 침투하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다”고 좌파 일각의 문화이론적 투항을 경계하고 있다.

더구나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은 정치·경제적 수준의 계급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완패했다는 것을 뜻했으므로, 현실적으로 진보 진영이 수행할 수 있는 계급 투쟁은 주로 문화의 영역에 있었다. ‘문화과학’의 창간 편집자들이 보기에 문화는 “재생산에 지대한 기능을 하는 이데올로기 작동의 중심 영역이면서 또한 변혁의 꿈이 마련되는 곳”이었다. 그러니 당시의 좌파 지식인 일부가 문화에 대해 과학적 인식을 확보하기 위해 ‘문화과학’이라는 이론적 실천의 장(場)을 마련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문화과학’의 창간사도 이 잡지의 첫번째 목표가 과학적 문화 이론의 구성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창간사는 “우리가 언제까지고 ‘이론선진국’의 이론을 수입해서 쓸 수는 없다”며 “이제 우리도 이론 생산에서 자생력을 길러 세계적 수준의 이론, 문화이론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문화과학’에 ‘이론선진국’들의 이론가들이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우선 탐색이 선행돼야 했을 터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알튀세르, 앙리 르페브르, 빌헬름 라이히, 라캉, 프레드릭 제임슨, 푸코, 하버마스 같은 외국 좌파 이론가들의 이름들이 주로는 수용적 맥락에서 때로는 비판적 맥락에서 초창기의 ‘문화과학’ 지면에 등장하고 있다.

그간의 ‘문화과학’ 지면을 되돌아 보면, 적어도 이 잡지가 한국어에서 ‘문화’라는 말이 지녔던 협소하고 고답적인 의미 영역을 크게 넓힌 것은 확실하다. 5호에서는 천도(遷都) 600주년을 앞두고 서울을 소재로 해서 공간의 정치 경제를 따져 보았고, 8호에서는 과학 기술과 문화의 관련을 탐구하기 위해 테크노 문화와 사이보그를 주제로 올렸다.

또 16호에서 다룬 생태 위기나 18호에서 다룬 신자유주의와 대의민주주의, 20호의 주제인 노동과 노동거부도 ‘문화과학’의 ‘문화적’ 관심이 대단히 넓다는 것을 보여준다. 편집자들은 ‘문화과학’을 ‘문화이론 전문지’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거기서 ‘문화’는 대단히 넓은 스펙트럼과 여러 겹의 몸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문화’는 문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재구성한 세계 전체다. 그래서 ‘문화 과학’이 개진하는 문화 이론은 사회 이론이기도 하고 정치 이론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문화과학’의 관점이 지금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이 잡지가 창간시에 다짐했던 문화적 실천을 위한 전략 마련이 지금까지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적 규모의 세력 관계와 이데올로기 지형을 생각하면 ‘문화과학’의 무능력을 탓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이 잡지가 문화와 사회를 바라보는 한 이단적 시각을 통해서 우리 사회 담론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창간사/ 역사의 한순환이 끝나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하고 있다. 인류 진보의 대안을 제시하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세계는 자본주의 단일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제 지배세력인 자본은 전지구적으로 별 저항도 받지 않고 그 지배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모색과 창조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민중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전지구적 지배로 인류 운명이 더 큰 위기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또다른 순환을 위한 새로운 기획을 세울 때다. 우리는 ‘문화과학’으로써 이 기획에 동참하고자 한다. ‘문화과학’은 문화에 대한 과학적 인식 확보를 통해서 변혁에 기여할 것을 창간 취지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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