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수-김병관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소유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 그 소유 대상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그것을 통해 자신을 알리고 과시하려는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유욕이 지나칠 때는 자신의 본질인 존재를 망각하고 외물인 소유에 집착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독재국가에서는 권력을 지닌 인물이 지도자가 된다. 그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타인을 지배하고 자신의 지위를 높인다. 이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행위이다. 재력가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돈 많은 사람으로 치부하면서 물질적 풍요를 강조한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금전이라는 물질을 내세우는 것이다.
또한 물질적 풍요를 중시하는 사회풍토를 조성하여 그것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의도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함에 있어 그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지금 소유한 대상이 영원히 자신의 분신이 될 것이라는 착각을 범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은 소유하는 사람과 소유당하는 대상간에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성립됨을 의미한다. 객체가 사람일 경우는 그 사람을 다스리는 권력을 지닌 것이고 사물일 경우는 물질적 혹은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것이다.
소유에 근거한 인간 심리의 허망성을 비판하고 있는 이곡의 ‘차마설’에서 보이는 그릇된 소유관은 물질에 집착하는 지나친 소유로 주체와 객체 모두가 사물로 변해 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이같은 그릇된 소유관을 극복하려면 소유대상인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올바른 자제가 요구된다. 사물을 대할 때는 상대방을 객체로 보기 보다는 같은 주체로 존중해주고 동등한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중시하여 제한된 유물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길이 사물을 대하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
‘말 타다 견마 잡히고 싶다’라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소유욕은 한계를 설정할 수 없다. 이러한 소유욕을 다스리려면 물질적인 대상에만 집착하는 소유관을 버리고 사람을 대할 때 동반자로 인식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우수1- 장보라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보편적인 인간은 아주 작은 것부터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충족되면 좀 더 큰 욕망을 지니게 되고 계속해서 새로운 욕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차마설’에서는 인간의 그릇된 소유욕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잘못된 인식에 대해 인간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차마설’에서는 소유의 본질을 한마디로 빌린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즉, 현재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부 권력 등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아니며 언젠가는 돌려줘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그 예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들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잠시 이용하고 다음 세대에 돌려줘야 한다.
이렇듯 인간은 사물에 관해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이 아닌 사물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물을 더 귀한 존재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물을 소유 또는 이용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양분 정도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양의 정복설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영원한 강자, 지속적인 약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강자는 약자가 자신에게 굴복하는 존재가 아닌 동등한 인격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이 유한한 것임을 깨닫고 욕심을 버리고 물러날 때에는 깨끗이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한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욕심을 버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덤으로 주어진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모든 인간이나 사물에 대해 고마움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우수2-이새롬
이곡의 차마설에는 그가 말을 빌려 타면서 느끼게 된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노마를 빌려 탈 때에는 스스로 조심하여 소중히 다루었지만, 준마를 빌려 탈 때에는 의기양양해져 함부로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것이나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대 사회, 소위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우리들은 과연 어떤 자세로 사물을 대하는지, 개인주의가 점점 더 팽배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소유 속에 담겨 있는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때의 이곡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 따라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물건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도 하고, 어떤 물건은 너무 하찮게 여겨 함부로 다루기 일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물의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또 편협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물을 대해야 할까? 이곡의 말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물은 빌렸다’란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어떨까?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사물을 대함에 있어 좀더 신중해질 수 있고, 또 그릇된 소유욕으로 인한 사회 불화도 생기지 않게 될 것이다. 덧붙여 모든 것, 심지어 인간까지도 하나의 기계, 도구로 인식했던 산업사회의 폐해가 아직도 남아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사물 하나하나를 도구가 아닌, 나에게 꼭 필요한 동반자로 인식하려는 노력도 요구된다.
현대 사회의 급속한 흐름 속에서 신속, 정확을 외치며 중요한 진리를 간과했던 우리에게 있어 이곡의 ‘차마설’은 큰 의미를 갖는다. 맹목적으로 사물에 집착했던 그릇된 소유욕은 던져 버리고, 누군가에게 잠시 빌려 쓰고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해야 할 때이다. 나아가 우리 모두가 사물을 ‘진심’으로 대한다면, 우리 사회의 그릇된 소유에 관한 인식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논술강평] 제시문 충실 소화 대안제시도 참신
이번 주 제시문은 이곡(李穀)의 ‘차마설’에서 뽑은 것이다. 이 글에는 인간의 그릇된 소유욕과 그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이 글을 참고로 하여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바른 자세”라는 주제로 논술하는 것이 이번 주 과제이다.
‘차마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빌리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지아비로부터, 비복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오늘의 현실에 확대 적용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 역시 모두 빌리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정치권력이 그러하고, 문화적 혜택이 그러하며, 심지어 자연환경마저 그러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살기보다는 잊고 살 때가 더 많다. 정치권력이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다고 믿고 함부로 남용하거나, 풍요로운 문화에 대한 향유가 이웃과의 협력 없이도 가능할 것이라고 독단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고, 주변환경이 자기 소유라 생각해 마음대로 파괴해 버린다.
‘차마설’의 지은이는 이러한 마음가짐과 행동을 교만한 것이라 하여 경계하고 비판한다.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바른 자세는 그릇된 소유욕과 교만함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다는 것이 제시문의 가르침인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내면화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특히 이번 주처럼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제를 다룰 때는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렇게 해야 상대방의 공감을 얻는 글을 쓸 수 있다. 내면화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주어진 자료를 반복해 읽어 자료가 지닌 의미를 완전히 나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후 글을 쓰는 것이다.
이번 주 최우수작으로는 김병관(부천고)의 글을, 우수작으로는 장보라(성지여고)와 이새롬(명덕외고)의 글을 뽑는다. 김병관의 글은 제시문이 주는 교훈을 자신의 것으로 충실히 소화한 후 쓴 글이다.
내용이 충실할 뿐만 아니라 논지 전개과정 역시 조리가 있고 자연스럽다. 네 개의 단락이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아울러, 대상에 집착하는 소유관을 버리고 타인을 동반자로 인식하려는 새로운 자세가 요구된다는 대안의 제시 역시 주목할 만하다.
장보라의 글은 쉽게 읽히면서, 그 내용이 적지 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이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지닌 문제점 지적이나, 인간의 관점이 아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대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 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깨달음에서 오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라는 지적에서는 글쓴이의 내면화된 목소리가 느껴진다. 최우수작에 버금가는 수준의 글이다. 이새롬의 글도 제시문을 충실히 소화하고 쓴 것이다. 자신의 주장 역시 잘 드러나 있다. ‘누군가에게 잠시 빌려쓰고 있다는 생각’에 대한 강조도 논점을 잘 잡은 것이다.
단 세 번째 단락과 네 번째 단락의 논지가 중복되는 것이 흠이다. 아무리 중요한 사항일지라도 유사한 내용을 두 단락에 걸쳐 반복 서술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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