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폐허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찾아가고 그곳은 나를 기다린다. 어쩌면 이 미쳐버린 시대에 폐허만이 숭고한 것인지 모른다.지구상의 골초들의 그리스에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택시 안이든 식당이든 거리이든 공항대기실이든 32인승 프로펠러 경비행기 안이든 담배연기로 차 있었다. 지독한 금연의 나라 미국에서 지독한 애연의 나라 그리스로 온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로 이름난 10년간의 싸움터 트로이가 호메로스 서사시의 신화 속에서 역사 속으로 뛰쳐나온 것이 19세기 후반이었다. 그곳이 터키 서북단의 한 폐허였다.
한 집념의 ‘일리아드’‘오딧세이아’ 애독자가 그의 재산을 몽땅 써서 트로이 히살르크 언덕에 괭이와 삽을 댔다. 험한 박토를 파헤쳐 나가자 그 일대의 지층은 가장 밑바닥의 제1도시로부터 제9도시까지 켜켜이 단층을 이루고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 제6도시가 트로이로 추정되었다.
이렇듯이 아나톨리아 대륙의 터키는 여러 시대의 지층을 마치 문명의 견본시(見本市)처럼 가지고 있다. 기원전 3,000년의 촌락에서부터 동로마 이전, 동로마, 셀축 투르크, 13세기말 이래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1922년 술탄제(制)를 폐지한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그 여러 문화들은 파괴와 약탈의 아픔을 되풀이하고 지진의 잦은 재앙에 파묻히며 삶과 문화의 지층을 쌓아올린 것이다.
터키 사람들은 이런 지층의 나이테 위에서 태어나 살아간다. 산천은 묵중하고 사람들의 더운 심정을 손님 대접 때 푸짐하게 보여준다.
아나톨리아 대륙은 동서로 가로누워 있다. 중앙부는 산악과 고원지대이고 해안의 둘레가 평야이다.
특히 서부 터키 해안은 굴곡이 심하다. 그 해안의 턱 밑에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은 그리스 영토이다. 그래서 터키 쪽에서는 괘씸하고 그리스 쪽에서는 아슬아슬하다.
사모트라키, 림노스, 레스보스, 히오스, 이카리아, 사모스, 레토스, 갈림노스, 코스, 로도스 섬이 작은 섬들을 데리고 터키의 만(灣)과 곶에 바짝 다가든다.
밤에는 건너편 터키 땅의 불빛이 보이고 낮에는 5킬로 내지 16킬로 저쪽의 원경으로 섬들이 수평선을 막고 있다. 나는 그 섬들을 건너가기 전에 터키의 바닷가를 먼저 떠돌았다. 트로이의 바닷가, 이즈미르, 에페소, 큐샤다스 바닷가에서 섬들은 다 자라난 아우처럼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에페소는 역사 속의 비경이었다. 우선 신약시대 바울의 ‘에페소 편지’를 낳은 곳이다. 아마도 그 시대는 원시기독교의 생채가 한껏 뿜어지고 있었으리라. 거기에 차츰 그리스적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이 스며들어 사변적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믿음직스러웠고 영성(靈性)이 유난스레 깊었던 젊은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지내면서 그리스 범신론에 대한 이단적(異端的) 시련을 겪은 곳이다.
실지로 요한은 에페소 건축가들이나 자존심 높은 그곳 귀족과 시민에 의해서 두번 이상 죽을 고비를 넘기고 쫓겨나 바다 건너 타르모스 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쓰기도 했다.
나는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고향 이즈미르로 갔다. 그곳은 터키 3대 도시의 하나이다. 셀축으로 갔다. 에페소의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그곳의 중국 요리로 힘을 얻었다.
에페소는 에게해 최대의 유적지이다. 그 찬란한 고대도시 에페수스가 몇천년 동안 땅 속에 파묻혀 있다가 1970년대에야 세상에 제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이집트 인도 중동 그리스 터키 일대, 심지어 중국 오지의 잃어버린 문명들이 유럽 고고학에 의해서 살아난 것은 크나큰 공헌이다. 에페소 유적도 유럽의 문명의식을 통해서 뚜껑이 열린 오래된 보물창고였다.
19세기말 트로이나 최근의 에페소 유적의 발굴이 있기까지는 그 지역에서는 믿을 수 없는 구비전설로 문명의 흔적들은 지하에서 신호만 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셀축 부근의 피온산 뒤에 에페소는 있다. 그곳은 바다 쪽에서는 멀리 내다보이지만 정작 그 부근에서는 숨겨진 얼굴이기도 하다. 그런 매혹의 도성(都城)이 3,00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이쪽에 다시 출현한 것이다.
사실 피온산과 코레코스 언덕 사이에 깊이 파묻혀 있는 유적이 햇빛을 보게 되어 하나의 명예로운 문명의 꽃으로 피어났고 아직도 피어나야 할 지역이 조심스레 그 꽃망울을 기다리고 있는 에페소야말로 고대의 처녀와도 같이 싱그럽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즈 신전이 있다. 아르테미즈는 다산(多産)의 여신이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양쪽 유방이 아니라 수많은 유방이 풍부하게 달려있다. 마치 한꺼번에 수많은 새끼를 젖먹이기라도 할 것 같고 수많은수컷들의 애무를 기다리고도 있는듯 했다.
그리스 신들의 세계에는 여신이 아주 많다. 특히 국가 수호신으로서의 여신이 많은 것은 미케네 시대의 특색이다. 그 이전의 크레타 미노스문명에 이어 본토 미케네 문명은 여신 숭배가 한창이었다.
그런 여신의 근거는 대지의 모성신앙이나 국가신과 토지와의 연결에 있다. 가이야 자체가 이미 대지 여신의 기원이었다. 이같은 여신 세우기가 헬레니즘의 관능적인 여체 예술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 틀림없다.
에페소 유적은 매우 알뜰살뜰했다. 살림 잘하는 주부의 표정 같았다. 결코 방만하지 않고 과장되지도 않은 건축들이 신의 허황한 크기보다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예술이었다.
그것은 어떤 화원(花園) 같기도 했다. 아니 그것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유려하게 흘러가고 있는듯 했다. 실지로 유적지 북쪽 고레소스 성문과 남쪽의 마그네시아 성문을 이어주는 중앙대로의 하얀 대리석 길은 어엿이 냇물처럼 내려가는 비단길이기도 했다.
진작 항구가 메워져 무역과 상업이 갑작스레 쇠퇴했기 때문에 산중의 창고도 교회로 바뀌게 된 적이 있다. 지금은 그런 추측도 할 수 없게 밋밋한 매몰지대가 되었지만 지난날 여기까지 바다에서 짐을 실은 배들이 연달아 들어오던 것이었다.
에페소는 몇번의 파괴와 지진만이 아니라 한 정신이상자의 방화에 의해서 폐허가 된 적이 있다. 도시 대부분이 돌로 만들어진 건물과 시설인데도 거기에 불길이 번졌다면 불타기 좋은 나무와 물자 그리고 목재건물도 많았다는 증거이다.
20대의 알렉산더가 이곳을 정복하자마자 도시를 다시 세워주겠다고 선심을 쓰는데도 이곳 사람들은 그것을 사양했다. 콧대가 어지간했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의 땀을 흘려 눈부신 대리석의 도시를 재건했던 것이다.
그 뒤 헬레니즘시대 로마시대의 문물을 더해갔다. 2만4,000명을 수용하는 대극장은 그 반원(半圓)의 공간을 위엄있게 이루어준다. 바로 이곳에서 에페소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을 탄핵했던 것이다.
로마 집정관 시대는 아시아지역 수도였고 당시 인구는 20만 이상이었다. 지금 발굴된 유적지는 당시의 귀족들이 사는 도심에 해당된다. 아고라(시장)가 두 군데나 이웃하고 있다.
대극장은 시민 전체가 참여하는 민회의 장소였다. 하지만 300명의 시민대표가 모이는 장소는 아래에 있는 음악당 오리온이었다. 수용인원 1,400명이고 노천 대극장과 달리 지붕이 있었던 것 같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파나야가프루 산이 있다. 길을 감돌아 싼 위쪽 성모 마리아의 집에 갔다. 예수가 십자가에 걸려있을 때 거기에 달려온 어머니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몇 제자들의 정경을 공관복음서는 전한다. 예수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한다. 마리아더러 요한을 두고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마리아에게는 장남 예수 말고 아이들이 더 있다. 그런데 어머니를 맡을 처지가 아니었던지 종교적인 의미에서인지 그녀는 아이들과 상관없이 원시교단에 맡겨진다.
젊은 요한은 갖은 고생 끝에 그녀를 모시고 시리아와 터키 해안을 지나서 에페소에 잠입했던 것이다. 기원 37-48년 사이였다.
이에 앞서 바울이 에페소에 있었다. 그도 추방당했고 그 뒤 요한도 추방당했다. 그는 다시 돌아왔고 마리아는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여기서 좀 내려가면 동굴이 있다. 7인의 기독교도가 에페소로부터 추방당해 그곳에 있다가 지진으로 파묻혀서 300년이 지난 뒤에 잠든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다. 그 자리에 어김없이 ‘잠든 9인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같은 수난 혹은 순교를 먹고 기독교 세계는 확대되었다. 기독교가 그리스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신플라톤학파의 신학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런 것보다 절박한 사실은, 에페소에는 나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바위와 돌이 드러난 산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올리브나무가 듬성듬성 붙어있을 뿐이다. 내일의 이곳은 다시 한번 태양 아래 폐허가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유적도 문화도 불가능한 멸망으로서의 폐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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