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1945년 8월 연합국에 통치권을 이양하면서 동과 서로 갈라선 뒤 첫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1970년 3월이었다. 이로부터 재통일까지는 9차례의 정상회담과 20년이 필요했다.분단 25년만의 첫 회담은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힘 입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지속적인 물밑 대화의 산물이었다. 실마리는 1969년 10월 취임한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가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하더라도 그들은 외국이 아니다”는 두 국가론을 제기하면서 마련됐다.
두달뒤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서독에 ‘동독 인정’을 요구했고, 브란트 총리가 “직접 만나 현안을 논의하자”고 제의하면서 역사적인 대면으로 이어졌다. 회담 장소가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에서 국경도시 에르푸르트로 변경되는 진통 끝에 성사된 회담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서독이 동독의 국가승인 요구를 거부한 때문이었다.
다만 브란트가 “어느 쪽도 전체 독일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주장할 수 없다”고 전독(全獨)대표권을 포기한 게 이후 회담의 연결고리였다. 의전도 초라했다. 브란트의 공식수행원은 내독부장관과 내무부차관 공보처장 등 10여명 안팎에 불과했고, 도착환영식 국가연주 의장대사열 예포발사 등도 생략됐다.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3개월 뒤 서독 국경인근 카셀에서 열린 2차 회담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하지만 양측은 꾸준한 실무접촉을 통해 양독 기본조약체결(1972년 12월), 유엔 동시가입(1973년 9월), 상호 대표부 개설(1974년 3월) 등을 잇따라 일궈냈다. 동서 베를린의 전화통화재개와 통행재개도 첫 정상회담후 각각 1년의 시차를 두고 이뤄졌다.
동서독은 1981년 12월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과 슈미트 총리의 3차 회담을 계기로 본격적인 경제교류의 물꼬를 트면서 통일의 물적기반 마련에 나섰다. 잇단 고위급 접촉을 통한 1982년 11월의 함부르크-베를린 고속도로 개설이 일례다.
양측은 1987년 9월 동독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서독을 공식방문한 호네커와 헬무트 콜 총리간의 4차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의례적인 수준에서 벗어난 동서독은 베를린 장벽 붕괴(1989년 11월) 다음달 열린 콜 총리와 모드로 동독 총리간 5차 회담, 이듬해 4차례의 정상회담 등을 거쳐 분단시대를 마감했다. 결국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빛낸 것은 더뎠지만 신뢰를 구축한 대화였다. 이런 상호교류의 증대가 동독의 질적인 변화를 초래했고, 이것이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정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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