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는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가리키는 바로미터다. 현재 국내 오케스트라는 KBS교향악단과 시립·도립·구립 등 공립 오케스트라 31개와 민간 오케스트라 23개를 합쳐 50개가 넘는다. 그러나 수준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오케스트라가 발전하려면 좋은 지휘자, 연주자, 청중의 삼박자가 맞고 충분한 지원이 따라야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국내 오케스트라 운동의 효시는 1926년 중앙악우회 관현악단의 첫 연주다. 그로부터 75년, 이제 국내 교향악단은 질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위기에 처한 오케스트라의 현황과 문제점을 짚고, 오케스트라를 살리기 위한 처방을 제시하는 시리즈를 매주 수요일자 음악면에 게재한다.
■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는 상상할 수 없다. 같은 오케스트라도 누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소리를 낸다. 지휘자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지휘자가 없다. 국내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기근 상태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지휘자는 많지만 좋은 지휘자는 드물다. 현재 국내 활동 중인 지휘자는 60여명. 그러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나 지휘자는 없다. 정명훈이 있다지만, 그를 길러낸 건 외국 교육과 외국 오케스트라이다.
국내 양대 교향악단으로 꼽히는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드미트리 키타옌코와 5월부터 서울시향을 맡는 마르크 에름레르는 러시아인이다. 대구시향 상임지휘자도 폴란드 출신의 보구슬라프 마데이다. 상임지휘자로 한국인을 고집할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국적보다 실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깐씩 머물다 가는 외국인 지휘자가 단원들간의 조화를 끌어내고 리더십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인 지휘자는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17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교향악축제에는 전국 13개 오케스트라가 참여하고 있는데, 그중 수원시향과 대전시향은 상임지휘자가 공석이다. 교향악축제를 앞두고 예술의전당이 30개 주요 교향악단을 조사한 결과 상임지휘자 없는 데가 7개나 됐다. 상임지휘자가 없다는 건 구심점이 없음을 뜻한다. 오케스트라를 배에 비유하자면 선장이 없는 셈이다. 선장 없는 배는 표류하기 십상이다. 지난 3년간 상임지휘자 없이 지내면서, ‘단원 맘대로’ 식의 무사안일과 침체에 빠졌던 서울시향이 본보기이다.
■ 지휘자가 왜 없나?
길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대학에 지휘 전공이 생긴 것이 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지휘자는 키우지 않고 악기 전공자만 내놨으니 오케스트라 역사가 절름발이 출발을 한 셈이다. 지휘자 키우기는 이제부터다.
1960-70년대만 해도 국내 오케스트라 하면 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 정도가 알려져 있었다. 대구시향, 부산시향 등 몇 개 지방 오케스트라가 있었지만 활동이 미미했다. 오케스트라가 적으니 지휘자 수요도 적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 특히 97년 한 해에 11개나 되는 오케스트라가 생기는 등 오케스트라가 폭증함에 따라 지휘자 모셔오기가 숙제가 됐다.
대학에 지휘 과정도 생겼으니 좋은 지휘자가 나올까. 부천필 상임지휘자 임헌정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본다. “어릴 때부터 작곡 연주 감상 등 다양한 음악 경험을 해야 좋은 지휘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국내 음악교육은 입시에 짓눌려 전공 실기의 기계적 레슨에 매달리고 있으니, 그래서야 어떻게 좋은 지휘자가 나올 수 있는가.” 결국 음악교육 전반에 걸친 개혁이 필요하다.
■ 좋은 지휘자는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대학이 지휘 전공자를 배출해도 그 다음이 문제다. 좋은 지휘자는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많은 지휘 경험이 필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로서는 아무한테나 지휘봉을 맡길 수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신참이 지휘대에 설 기회는 적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휘자를 발굴하고 양성하기 위해서는 신진 지휘자 데뷔 무대나 부지휘자 제도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 부지휘자는 상임 또는 전임 지휘자 밑에서 훈련을 쌓으면서 작은 무대는 직접 지휘해보는 경험을 통해 지휘자로 클 수 있다. 정명훈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대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밑에서 부지휘자로 출발했다. 현재 부지휘자가 있는 데는 부산시향, 울산시향 정도이고, 신진 지휘자 데뷔 무대를 운영하는 데는 서울시향 뿐이다. 더 늘어날 필요가 있다.
■ ‘메이드 인 코리아’ 지휘자를 키워야
2일 한국지휘자협회가 출범했다. 이날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된 지휘자 박은성(한양대 교수)씨는 협회의 장기목표로 ‘메이드 인 코리아’ 지휘자 양성을 꼽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기악 분야도 그렇지만, 지휘자 치고 국내 교육이 길러낸 지휘자는 전무하다. 한국 교향악의 산증인인 원로지휘자 임원식은 물론 박은성, 임헌정, 정치용, 장윤성 등 지금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휘자들도 외국에 나가서야 비로소 쳬계적인 지휘 교육을 받았다.
이제 ‘메이드 인 코리아’ 지휘자가 나올 때가 됐다. 이를 위해 협회는 지휘 콩쿠르, 지휘 훈련 코스 등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내 교육으로 지휘자를 길러내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보스턴 심포니의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를 비롯해 많은 ‘메이드 인 저팬’ 지휘자들이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다.
■ 지휘자는 장수해야 한다
지휘자 배출도 어렵지만, 오케스트라에서 장수하기는 더욱 힘들다. 실력이 없거나 리더십이 부족하면 단원들과 마찰을 빚고 밀려나거나 쫓겨나기 십상이다. 국내 지휘자의 70~80%가 그런 일을 겪었다. 최근에도 지난해 수원시향에서 그런 일이 있었고 현재 충남교향악단이 같은 일로 시끄럽다. 음악평론가 탁게석씨의 표현에 따르면 “국내 오케스트라 역사, 특히 80년대 후반부터는악단과 지휘자의 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부천필의 임헌정은 취임 때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가는 지휘자가 되겠다.” 다행히 그는 12년째 부천필을 모범적으로 이끌고 있다.
서울시향 단장인 지휘자 정치용씨는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와 한 몸이면서 동시에 딴 몸이어야 한다”는 말로 지휘자의 역할을 설명한다. 단원을 화합으로 이끌되 음악 향상을 위해 매질과 견제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휘자 노릇은 그만큼 미묘하고 어렵다. 좋은 지휘자를 길러내고 아끼는 것은 오케스트라 뿐 아니라 청중의 몫이기도 하다.
◆ 국내 주요 교향악단 현황
■수도권지역
KBS교향악단/키타옌코
서울시교향악단/정치용
코리안심포니/홍연택
서울심포니/이진권
서울아카데미심포니/장일남
한국심포니/하성호
뉴서울필하모닉/박태영
서울로얄심포니/임평룡
서울내셔널심포니/이종일
프라임필하모닉/장윤성
강남구립교향악단/서현석
인천시립교향악단/금노상
수원시립교향악단/없음
부천필하모닉/임헌정
경기도립팝스/최선용
■강원 지역
춘천시립교향악단/없음
강릉시립교향악단/홍윤식
원주시립교향악단/없음
■충청 지역
충남교향악단/이병현
대전시립교향악단/없음
청주시립교향악단/없음
■호남 지역
전주시립교향악단/없음
군산시립교향악단/없음
광주시립교향악단/김용윤
목포시립교향악단/김연주
■영남 지역
진주시립교향악단/최천희
대구시립교향악단/마데이
부산시립교향악단/곽승
마산시립교향악단/이동신
창원시립교향악단/김도기
울산시립교향악단/장윤성
포항시립교향악단/박성완
■제주도
제주시립교향악단/이동호
오미환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