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키로 쌍방이 합의했다고 서울과 평양에서 4월10일 동시에 발표한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다. 1994년 김영삼(金泳三)대통령 재임시 합의됐던 정상회담이 7월 김일성(金日成)주석이 돌연 사망함으로써 무산된 이래 남과 북 사이에는 긴장과 대결이 계속되어 우리 국민들의 대북 실망과 불신감은 고조되었다.북한은 소위 핵카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미국만을 상대로 하는 대화를 고집하고 남한당국은 적극 기피하는 전술만을 추구해왔으므로 정상회담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보였다.
최근의 동향을 보더라도 3월9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유럽 순방중 독일에서 발표한 소위 ‘베를린 선언’에 대해 북한측은 매우 미온적이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또 서해안 선박항해에 대한 북한의 일방적인 규제조치나 평양에서 개최예정이었던 양측 민간차원의 공동음악회가 최종단계에서 무산된 점도 대북 불신감을 더하게 했다. 그래서 정상회담 합의는 더욱 큰 뉴스이고 크게 환영받을 것이다.
국민들이 현재 갖고 있는 대북 불신감은 남북간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속에서 상호협력하고 교류하면서 평화통일로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근원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만큼 ‘상호 신뢰감의 조성’은 회담의제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6월 회담에 앞서 이에 관한 세부사항이 상호간에 원만히 정리되는 것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북한측 발표를 보면 7·4 공동성명을 다시 언급하고 있는데, 과거 경험에 따르면 조국통일 삼원칙의 해석에서 남북한 사이에 상당한 이견이 생겨 대화진전이 어려웠던 경우가 있었고 특히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입각하여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문제에 간섭하면서 철수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어 많은 혼란이 야기된 적도 있었다.
사실 1949년에 완전 철수했던 미군이 다시 한반도에 오게되고 또 그 후 남한에 합법적으로 주둔하게된 근본원인은 불법 남침으로 야기된 6·25 전쟁에 있었는데 북한은 항상 그 원인은 외면해 왔다. 이러한 전술도 상술한 대북 불신감이 지속되게 만드는 원인의 하나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금번 남북 정상회담은 역사상 최초의 회담이기 때문에 의제준비가 중요하다.회담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자면 무슨 의제를 선정하고 회담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그 방법과 순서 등 절차가 사전에 합의되어야 할 뿐 아니라 정상을 보좌하는 고급참모들이 사전 협의를 가져 정상간의 합의서 초안을 준비하고 회담후에는 공동발표문이 나오는 것이 국제관례이다.
만약 이견이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대목은 발표문에서 빼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1972년 닉슨 미 대통령과 마오쩌뚱(毛澤東)중국공산당 주석이 베이징(北京)회담후 발표한 소위 ‘상하이(上海)성명’처럼 이견이 있던 부분을 포함시킨 경우도 있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은 선언의 형식으로 그대로 기록에 남기자는 것이다.
그러나 회담내용은 쌍방이 민주적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의 숙원 실현에 얼마나 강렬한 의욕을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의제 선택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별한 의제없이 조국의 평화통일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광범위한 의견교환을 통해서 상대방의 진의가 무엇인지 깊이있게 서로 파악할 수만 있어도 회담의 유용성은 매우 클 것이다.
아울러 1992년 2월 남북 합의서의 실천을 확실히 약속하는 합의까지를 겸한다면 그것으로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금번 발표가 4월13일에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직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여야 정당사이에 혹 발표시기와 그 의도에 관해서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음을 감안하면 투표일 후에 발표되었으면 더욱 빛나는 행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박동진 한국외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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