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의 ‘연행도기행’이 지난주 13회로 끝났습니다. ‘연행도’는 박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정간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찾아낸 그림 25장의 화첩으로, 인조의 왕권을 승인받기 위해 1624년 바다 건너 명나라로 간 이덕형 등 조선 사절단의 행적을 담은 귀중한 사료입니다.글로 쓰여진 연행록은 많지만, 그림으로는 영조시대인 1760년의 육로 연행도(숭실대 소장)가 딱 한 벌 있고, 바닷길 연행도는 이번에 발견된 것이 유일합니다. ‘연행도기행’은 박교수가 이 화첩의 사절단이 갔던 길을 답사한 기록입니다.
연재를 마치며, 이 기행에 큰 관심을 보여 준 고병익(문화재위원장, 전 서울대총장), 이우성(민족문화추진회장, 연세대 석좌교수) 두 분 원로학자의 의견을 들어봤습니다.
이번 ‘연행도’는 사료로서 얼마나 가치있는 것입니까.
고병익 조선시대 연행 사절은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연행록도 방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으로 된 것, 특히 바닷길로 간 기록은 드물지요. 드문 기록과 드문 그림이 겹쳤으니 이 분야 학자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에게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지요.
이 화첩을 찾아낸 건 ‘파천황’(破天荒)의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회에 기록화와 기록문화에 대해 좀더 연구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우성 조선시대 연행 사절은 주로 만주로 해서 산해관을 지나 베이징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그쪽 풍물이나 상황에 대한 기록이 많지요. 그런데, 이번 연행도의 이덕형 일행은 바다를 건너 산둥지방에 상륙한 뒤 육로로 베이징까지 올라 갔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행도에 나오는 산둥성 일대 유적이나 풍광, 풍물 등은 종전 연행록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라 무척 재미있어요.
366년 전 조선 사절의 행로를 오늘날 다시 살피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우성 바야흐로 서해안 시대를 맞아 한중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한중 관계가 긴밀해지는 시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옛날 한중 교류의 발자취를 추적한 이번 ‘연행도 기행’은 오늘의 시대 상황에 비춰도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병익 몇 해 전만 해도 중국은 공산국가다 해서 관심이 적었어요. 그런데 재작년 하반기부터 중국 학자들이 한중 문화교류에 관심을 높이면서 연행록에 흥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연행록 중 최고 명문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인데, 이게 작년 중국의 상해서적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이덕형 일행의 외교 임무는 인조의 왕권을 승인받는 것이었는데, 이는 국가자주권에 어긋나는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청나라가 발흥하고 명나라가 멸망해가던 때임을 감안할 때, 외교적 현실감각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우성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아무런 정식 관계가 없었고, 전통적 관례에 따라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명나라를 실리에 따라 하루아침에 배반한다는 건, 유교 국가인 조선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광해군은 명·청 등거리 외교를 펼치다가 인조반정으로 겨났는데, 광해군이 있었더라도 종전 외교관계의 기본틀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겁니다. 따라서, 명분에 집착하다 훗날 낭패(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을 가리킴)를 당했다고,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병익 왕권 승인을 남의 나라에 받으러 간다는 게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불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로선 당연시됐을 겁니다. 우선,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데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둘째, 당시 청나라는 야만을 대표하는 족속, 명나라는 문명국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문명 파괴 민족을 인정할 수는 없었던 거지요. 또 인조반정이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전까지 왕권 승인은 의례적인 외교 절차일 뿐, 명나라가 트집 잡은 적이 없었는데, 인조는 반정이라는 쿠데타적 방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불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고 조선 사절은 그걸 변명하기 위해 갔던 것이지요.
이번 연행도를 비롯한 연행 기록들의 문화사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고병익 신라나 고려 때만 해도 외국과 바다로 내왕이 많았지요. 그러나, 근세 들어 그게 금지되면서 외교 사절의 연행록은 당시 외국 사정을 조선에 전달하는 작지만 거의 유일한 창구 역할을 했고 그래서 더 귀중합니다.
연행 사절은 매번 같은 길로 가서 비슷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연행록도 여행기의 신기함은 별로 없고 내용이 단조로운 감이 있지만, 번번이 꼼꼼하게 기록을 남긴 것은 기록 문화 보전에 주목할 만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오미환기자
■[연행도기행을 마치며] 연행도의 회화적 특징
‘연행도’는 조선 사절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혁으로 1621년에서 1637년(이해 대명 외교가 단절됨)까지 17년 동안 바닷길로 명나라를 내왕할 때 사절의 수행화가가 그린 유일한 사행도(使行圖)이다.
출발에서 귀환까지 모두 25장의 그림으로 구성된 ‘연행도’는 둘도 없는 귀중한 역사기록화이며 또한 정교한 기법으로 그려진 훌륭한 회화작품이다. 조선 중기 회화사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린 이를 똑똑히 알 수는 없지만 그림에 담긴 메시지와 사절들 기록(홍익한의 연행록)의 키워드를 잘 맞춰보면 1624년 이덕형 사행 때 그려진 것이 확실하다.
‘연행도’ 화첩 25장의 그림은 조선사절이 지난 중국 땅 여러 곳의 실경을 탁월한 기법으로 충실히 사생해 모든 경치를 모아 담은 이른바 전경식구도(全景式構圖)이다. 산수, 인물, 화조, 옥우(屋宇, 집·건물 등의 구조물) 등이 다양하게 적재적소에 들어있다.
우선 산수화의 중심인 울퉁불퉁한 산과 바위의 묘사는 전통적 준법(준法), 곧 피마준(披麻준)과 운두준(雲頭준)을 적절히 구사해 중량감과 위압감을 잘 나타내고 25번째 그림 ‘선사포회박도’(宣沙浦回泊圖)의 바위처럼 근경의 바위는 이끼를 그린 태점(苔點)으로 실감을 돋구었다.
또 나무는 실경 그대로 버드나무를 가장 많이 그렸다. 수지법(樹枝法) 상 버드나무는 무성한 작은 잎새를 가진 개자점(介字點, 아래로 늘어지는 작은 점)으로 처리하지만 그림의 계절은 낙엽지는 소소(蕭疎)한 가을인지라 잎새 대신 버들가지를 늘어진 유선으로 처리해 계절감을 살린 것이다.
버드나무 다음으로 많은 것은 매화나무 같은 것으로 매화점(梅花點), 소혼점(小混點)으로 묘사해 촘촘한 멋을 나타냈다. 10번째 칭저우(靑州) 그림에 등장하는 감나무 한 그루는 주렁주렁 달린 주홍색 열매가 매우 인상적이다.
그림의 계절은 모두 가을인데, 마지막 그림인 25번째 ‘선사포회박도’ 한 장만은 생생한 활엽수와 밝은 색감의 춘경(春景)으록 그렸다. 홍익한 일행이 선사포에 귀환한 것은 1625년 5월 7일(음력 4월 2일). 뒤늦은 북녘의 봄이 한창 흐드러질 때이다. 그린 이의 자상한 마음씨와 섬세한 솜씨가 화폭 위에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화조의 솜씨 역시 뛰어나다. 12번째 그림 저우핑(鄒平)의 수광호에 그린 일곱 마리 물오리 그림은 언뜻 보면 한낱 점경(點景) 같지만, 자세히 보면 앞에 세 마리는 쭉 한 줄로 헤엄치고 뒤의 네 마리는 등거리로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자리 매김이 아니라 모여 있는 것과 떨어져 있는 것을 대비해 밀(密)과 소(疎)를 연출한 멋진 구도이다.
또 오리들의 동작이 제각각이다. 맨 앞의 것은 뒤돌아보고, 따라가는 네 마리는 앞을 보고, 다음 한 마리는 나래를 수평으로 펴고 막 물 위로 날아들고, 마지막 한 마리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른다. 산수화에 화조를 배합해서 생동감을 불어넣은 그린 이의 탁월한 퍼포먼스가 힘차게 약동하고 있다.
그림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세련된 옥우법(屋宇法)의 필치로 그려진 일련의 계화(界畵)이다. 5번째 덩저우(登州)의 봉래각(蓬萊閣) 그림은 으뜸이다. 겹겹이 들어선 건물을 바로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약간 둔각의 구도로 엇비슷하게 측면을 살려 구조물의 양감과 종심(縱沈)을 효과적으로 살린 것이다. 다리의 그림도 걸작이다.
칭저우의 만년교, 장치우의 수강교, 치허의 대청교, 쭈어저우의 영제교의 다리 난간, 난간 기둥, 교각 등의 묘사가 꼼꼼하고 정치(精緻)하다. 화폭마다 등장하는 인물화도 빼놓을 수 없는 뛰어난 그림 솜씨이다.
보통 산수화에 등장하는 인물화는 현실감 없는 생경한 필치로 그려진 유형적인 인물상이지만, 연행도의 인물들은 모두 생생한 저자의 생활인들이다. 인물상은 거의가 입상이지만, 몸놀림이 단조롭지 않고 매우 다양하다.
유연한 굴신묘(屈伸描)로 그려진 조선사절의 행렬도를 비롯해 현지 중국인들의 다양한 모습이 화폭 위에 약동한다. 걸어가는 모습, 말탄 모습, 수레, 마차를 모는 사람, 주인과 종자, 물건을 들고가는 삶, 아는 이를 만나 절하는 사람, 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는 사람들. 십인십색이요 백인백태이다.
이 시대에 그려진 대표적인 기록화로 한시각(韓時覺)의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함경도에서 과거시험 광경 그림)가 알려져 있지만 역사성, 국제성, 회화성으로 볼 때 ‘연행도’는 이를 훨씬 능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박태근·관동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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