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로 엄청난 홍역을 치렀던 아시아 은행들이 생존을 위한 대변신에 한창이다. 기업을 고객으로 했던 지금까지의 거래관행에서 탈피,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소비자 금융’(Consumer Banking)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나선 것이다.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소비자 금융은 아시아에서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황무지 분야였다. 기업, 특히 대기업을 상대로 한 장사가 그만큼 이익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익이 위험을 전제로 한 것이고, 위험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자각이 싹트면서, 소비자 금융이 21세기 은행의 흥망을 결정짓는 변수로 떠오른 것이다.
은행이 이익창출의 최우선 순위로 삼는 것은 각종 서비스 개발을 통한 수수료 수익. 인터넷 뱅킹, 저당·신용 대출 확대도 소비자 금융의 핵심분야다. 특히 은행 고객을 기업에서 일반 대중으로 바꾼 인터넷 뱅킹은 앞으로 은행의 생존여부를 가름하는 잣대로 부상했다.
은행의 변신에는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금융계의 구조조정 회오리가 한몫했다. 부실대출 등 과거 은행 관행에 강력한 제동을 걸고 있는 필리핀은 부실은행 퇴출의 수단으로 은행간 인수합병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수십개로 난립해 있는 금융 풍토에서는 효과적인 제재와 단속이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아시아 외환위기를 별 피해없이 비켜갔던 싱가포르는 외국계 은행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면서, 국내은행에 선진국 은행 출신 인사를 이사회에 영입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대출의 투명성을 염두에 둔 조치이다. 역시 은행간 인수합병을 금융개혁의 열쇠로 보고 있는 말레이시아는 10개의 ‘지주(Anchor)은행’으로 금융계를 재조정할 계획이다. 이밖에 중소기업의 파이낸싱 창구가 은행에서 증권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는 한국, 외국계 은행과의 제휴를 통해 우량성을 확보하려는 태국 금융당국의 개혁도 ‘살아남기’ 위한 은행의 변신을 부추기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메릴 린치 방콕지사의 로버트 콩 수석연구원은 “미국, 유럽에서는 소비자 금융이 민간은행 대출의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며 “은행의 재무제표와 수익구조도 소비자 금융을 중심으로 대개편을 겪을 것” 이라고 전망했다.
강화된 규제로 인한 기업대출 급감, 증권·채권시장 개방으로 인한 치열한 경쟁구조에서 은행이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은 결국 ‘다수를 위한 은행’으로 변신하는 것 뿐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황유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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