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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고사의 실제/4월 8일자 주제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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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고사의 실제/4월 8일자 주제 당선자

입력
2000.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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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김우진

배가 고프면 먹으려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이며 육체와 영혼의 욕구이다. 무엇으로든 고픈 배를 채우고 나면 육체는 이를 영양분으로 흡수해 피와 살을 만들고 정신적으로는 포만감을 얻게 된다. 그런데 만약 배고픈 이가 먹지 않으면 그는 얼마 못가 죽게 될 것이다. 따라서 먹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생존 자체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권력욕에서의 ‘욕’이란 욕구가 아니라 욕망이다. 왜냐하면 권력을 갖지 못한다 하여 인간생존자체를 위협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욕구라는 것은 그 생물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생물학적, 심리적인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그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뭔가를 바라며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육체를 근본적으로 떠나 생각할 수 없지만 ‘욕구’보단 좀더 자유롭고 포괄적이라 하겠다. 욕망은 야망, 이상과 상통하는 의미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삶 자체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 세계적인 재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면 그는 대학 학과를 선택하더라도 경제학과를 먼저 볼 것이요, 그 과를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이며 필요한 사업지식을 습득하고자 선생님과 상담하기도 하고 컴퓨터통신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인간은 뜻하지 않은 고비를 맞게 된다. 이때 이 고비를 극복할 수 있는 필연적 덕목이 바로 ‘의지’이다. 그런데 재벌이 되고 싶다는 것은 곧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의지라는 덕목 또한 영혼과 육체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불굴의 의지로 공부한 결과, 원하는 대학의 경제학과에 합격하여 훗날 그가 재벌이 되기 위해 투자한 그 동안의 의지가 잘 먹고 잘 산다는 근원적 욕구로 구체화된 것이다. 만약 의지가 없었더라면 의지를 통해서만이 충족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욕구는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는 욕구 없는 의지는 있을 수 없으며 의지 없는 욕구 또한 있을 수 없다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명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항상 필연적 관계로 얽혀 있어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핵심중추로서 작용하게 된다.

■우수1

황혜연

우리는 ‘이성’이라는 한 단어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한다. 이렇듯 인간 고유의 정신적 가치인 ‘이성’과 다른 동물과 인간의 공통적 특징인 동물적, 육체적 가치 ‘욕망’은 그 의미에서 반의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이성이 있는 동물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이 반대되는 두 가지 성질, 욕망과 이성이 동시에 나타난다. 과연 이성이 욕망을 부르는 것일까. 반대로 욕망이 이성을 부르는 것일까.

스피노자는 ‘윤리학’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우리가 좋다고 판단해서 욕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얻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좋다고 판단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펼쳤다. 즉, 스피노자는 욕구나 욕망이 이성적 판단을 부른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성적 판단이 욕망을 부른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것은 ‘돈’이다. 그것의 원료는 종이 쪽지에 불과하다. 만약 돈이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다면 그것은 다만 색깔있는 메모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돈은 화폐로서 사회적 약속이 되어 있고,‘돈은 어떤 물건이든 살 수 있다’는 이성적 판단이 돈에 대한 욕구를 부르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무더운 한 여름날, 길을 가다 목이 마르면 가장 큰 욕구를 느끼는 것은 ‘물’일 것이다. 당신은 이때 왜 하필 물을 원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나는 목이 마르다’, ‘물은 갈증을 해소한다’,‘ 그래서 난 물을 마시길 원한다’는 이성적 판단의 단계를 거쳐 느끼는 욕구인 것이다.

만약 스피노자의 주장을 따른다면 이성을 부르는 처음의 욕구는 무엇에 근거하여 일어난다고 설명할 수 있는가. 동물적 직감으로 좋을 것 같아서 괜히 얻고 싶어서 욕망이 생기는 것이라면 그건 운명이나 원시적 육감, 동물적 직감이라는 비과학적 용어로밖에는 접근할 수 없는 진리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이성을 지닌 유일한 동물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 대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성적 판단을 진행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좋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며 그 이성이 욕구를 부르는 것이다. 이성이 부른 욕구는 인간의 욕구이지만 이성적 판단 없이 작용하는 욕구는 단순히 동물적 직감에 기초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전자만을 인간의 성질이라 말하고자 한다.

■우수2

장소영

행복이라는 이 추상적인 단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지향점, 또는 만족의 지표로 삼고 있는 가장 공통된 개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려는 그들은 각기 다른 환경과 가치관의 영향으로 행복한 삶의 모습과 그것을 이끌어가는 방향에 있어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그 속엔 인간의 생존에 있어 가장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버팀돌에 해당하는 욕구의 만족에 대한 희망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가 만족된 상태, 삶의 질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에 이른 후에야 좀더 가치지향적이고 사회공헌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직 영혼에 관계하는 애씀을 의지라고 일컫을 수 있다고 말했던 철학자 스피노자 또한 영혼과 육체에 동시에 관여하는 욕구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욕망은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갖는 것이라 하겠으나 욕구가 더 근원적임을 부정할 수 없고 또한 욕구를 가진 후에 그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뒤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개념에 어느 한 부분 만큼은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있음에 동의하게 된다. 사람들은 행복을 지향함에 있어 그들이 기본적으로 원하는 욕구의 충족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본질적인 만족의 바탕 위에 부귀, 명예, 또는 권력과 같은 행복의 본질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흐름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안정치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좀더 쉽게 납득할 수가 있다. 그들은 그러한 욕구가 충족된 후에야 마음의 평화 상태에 다다를 수가 있을 것이며, 안정된 상태에서만이 좀더 가치있는 행복을 위한 수단들의 발휘를 도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의 위치가 생존을 위한 욕구충족이라는 전제 아래에선 욕구의 뒤에 놓여짐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일상 속에서 끝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본질적인 욕구에 대한 만족은 필수적인 것이며 반드시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욕망의 실현은 그들의 욕구가 충족된 후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위해 좀더 가치있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음에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뒤따를 수 있을 것이다.

■[논술강평] 욕구·욕망 잘 구별 논지전개도 뛰어나

이번 주 논술 주제는 이성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가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대목이 제시문에서 주어졌고 이에 대해 일상 속에서의 어떤 사례를 들어 그의 견해를 검토해 보라는 것이 출제자의 주문이었다. 제시문이 부분적이고 압축적이어서 스피노자의 사상이 여기에 충분히 드러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우선은 그의 생각의 핵심을 잘 포착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풀이해 보자면 그의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욕구를 갖는다. 그 욕구는 심성에도 물론 관련되지만 근본적으로 육체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에 비해 욕망이란 자기인식을 통해 그 위에서 더 확장되고 변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태도나 문화적 사회적 생활 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의 수위와 균형을 잘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을 위해 핵심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육체적인 것과는 관련되지 않는 의지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의지가 이렇게 삶의 균형을 잘 잡도록 작용하게 하는 것은 이성적 사유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즉 욕구나 욕망의 대상)은 좋은 것(즉 가치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실은 어떤 욕구나 욕망의 대상이 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인지, 우리의 삶 전체와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인지 이성적으로 잘 판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욕구나 욕망이 통제될 수 있도록 의지가 발동되어야 한다. 즉 진정한 가치는 이성에 의해 승인된 욕구의 대상이다.

자, 한편으로는 욕구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 사유의 역할을 중시하는 스피노자의 이런 견해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그의 견해에 동조하여 이성의 힘을 강조하는 논변을 펼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그의 생각이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지 사례를 들어가며 논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금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욕망하는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는가? 스피노자처럼 앞의 명제를 지지하는 입장을 철학자들은 이성주의적 합리주의적 윤리설이라고 이름짓고, 그와 반대되는 뒤의 명제를 지지하는 입장을 철학자들은 자연주의적 경험주의적 윤리설이라고 이름짓는다.

신체적·심리적 욕구처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성향을 가치판단의 기초로 보자는 것이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 철학이라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과는 무관한 ‘이성적’사유의 ‘합리성’을 중시하는 것이 합리주의 철학이라 하겠다.

깊이 파헤쳐 보면 두 가지 학설이 각기 강점과 약점을 다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성주의가 신체를 갖고 사는 인간의 삶의 현실적 경험을 소홀히 하는 점에서 약점을 갖는다면, 자연주의는 변화무쌍하고 상대적인 경험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기준을 찾기 어려운 난점을 갖는다.

인간의 삶이 신체성과 정신성 두 가지 계기를 동시에 지니는 이중적 성격을 갖기 때문에 이 두 이론의 대립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이번 주 응모작 가운데는 글 자체가 논리적으로 일관성과 정합성을 잃지 않고 조리있게 잘 쓰여진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논제가 평이한 것이 아닌 점도 있고 제시문에 드러난 스피노자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수한 것으로 눈에 띄는 글은 김우진, 황혜연, 장소영의 것이다.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와 사회적 문화적 여건에 따르는 욕망을 잘 구별한 점, 그리고 이성의 통제를 실현시키는 의지의 역할을 잘 기술한 점에서 김우진의 글은 다른 글들보다 뛰어나다. 김우진의 글은 대체로 스피노자에 기대어 그를 지지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욕망의 내용으로 자신의(?) 진학 방향을 구체적인 사례로 든 것도 논변을 추상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황혜연은 제시문을 지나치게 축어적으로 읽어 스피노자의 생각을 거꾸로 이해했는데(제시문의 한계성에 비추어 볼 때 이 점은 결정적인 결함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것이 그의 논술 자체를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을 만큼 논리적 정합성을 잘 지켜내고 있다.

그는 스피노자를 거꾸로 이해했기 때문에 스피노자를 반박함으로써 본래의 스피노자의 생각에 부합하는 자신의 논변을 펴고 있다. 논변 가운데 이성의 역할에 대한 스피노자의 견해를 벗어나는 내용(이성적 판단이 욕구의 근원인 것처럼 설명한 부분)도 있지만, 그의 치밀한 분석 자체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제시문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행복 개념을 추론하여 논술내용을 수렴해 가는 구심점으로 삼은 점에서 장소영의 글은 남다르다. 전체를 조망하는 사고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뛰어나다는 말이다. 그리고 수단적 가치의 부차성을 지적한 점도 좋았다. 그러나 글의 중반 이후 기대한 만큼의 논변이 나오지 않고 주로 자신의 생각을 그저 제시하는 데 그친 점이 아쉬웠다. 우열의 차이가 크진 않으나, 이 세 사람의 글을 차례대로 최우수작, 우수작 1, 우수작 2로 뽑는다.

손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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