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대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진부한 대답은 뉴스가 안된다. 그럼에도 진부한 질문을 해야할 때가 많다. 진부하다함에는 되풀이된다는 뜻이 있을진대 되풀이 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개혁 재벌개혁 교육개혁 등 때만되면 되풀이되는 뉴스소재들도 아마 다 그런 것들일 것이다.기자는 원로과학자 김용준(金容駿·73)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나 ‘기초과학이 왜 중요한가. 기초과학을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누구나 답을 다 알고 있을 이 질문을 던진 것은 기초과학의 중요함이 다시 강조되고 있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공계를 지원하는 고교졸업생들은 머리 아픈 수학이나 물리학, 화학은 물론 진화론의 발전으로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 되어버린 생물학 등 기초분야는 제쳐놓고 대학졸업후 당장 편한 전자공학이나 컴퓨터 관련 학과를 선호한다. 대학도 뒤질세라 지방 어느 대학은 수학과와 물리학과를 페지키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기초과학 없이 산업기술 발전이 있을 수 없고, 지금 온 세상을 들쑤시고 있는 벤처도 기초과학 없이는 성립되지 않음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일제때도 이공계 학생들은 징집안돼”
“기초과학이 왜 중요하냐고? 그런 질문을 하도 여러번 들어서….” 아니나 다를까, 하나마나한 질문을 또 하느냐는 질책이 앞섰다. 그러나 이어진 답변은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평생을 주장해온 바가 아직 ‘씨도 먹히지 않고 있다’는 소회의 반영일 것이다.
“그런 질문들을 때마다 내가 왜 이공계를 선택, 유기화학자가 되었는지 아느냐고 되묻지. 징병에 안 뽑히기 위해서였어. 일제말기 일본당국이 전쟁에 곧 질 줄 내다보면서도 이공계 전공자를 군대에 보내지 않은 건 기초과학의 맥을 잇기 위해서라고 봐야 해. 그렇게 장래를 내다보았기 때문에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나서도 곧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이지. 우리나라는 뭐했나. 그동안 수십년을 ‘과학입국 운운’하면서 실질적으로 한 일 뭐있나. 수십 번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때 뿐이었지.”
“전투기 두 대만 안사면 학문발전에 쓸 돈 나온다.”
“요즘 박사학위 딴 젊은이들을 보면 불쌍해요. 나만해도 60년대에 박사를 따 평생 그거 하나로 엔조이하면서 살아왔지만 요즘 박사들은 길거리 개똥 취급도 못받는 것 같아. 그렇게 어렵게 박사를 딴 사람이 곧 10만명이 된다는데 자리를 못찾아 보따리 장사나 하고 있으니 말이 되는 소리야. 있는 인재들도 쓰지 않으면서 사람이 없다고 딴 소리만 하니 기초과학은 커녕 무슨 학문이 발전하겠어.” 고희를 3년이나 넘겼는데도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마뜩찮은 것들에 이야기가 이르면 카랑카랑한 정도가 아니라 쩌렁쩌렁했다. 오척단구라는 표현이 크게 실례될 것 같지 않은 체수에 선비처럼 단아한 모습이지만 금세 손짓 몸짓에 에너지가 넘친다.
“박사가 너무 많아 모두 취업시키려면 돈이 엄청 들텐데”라고 말꼬리를 잡아보았지만 “전투기 두 대만 안사면 그들 모두를 활용할 수 있을 거요. 국방부 예만 들어서 안됐지만…”이란 말이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경험이나 제자들의 경우를 봐도 학위를 마친 직후가 가장 머리가 활발하게 돌아 제일 알맹이 있는 연구가 진행됐다며 학위를 갓 마친 젊은이들을 이렇게 마구 놀리는 나라는 지구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라고 거듭 인재활용을 강조했다.
“아인슈타인도 한국 대학에서는 못 배긴다.”
“교수는 놀아야 창의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직업이야. 학자를 말하는 영어 ‘Scholar’는 원래 라틴어로 ‘여가’라는 말이 어원이지. 학문을 하려면 여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그냥 놀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갖고 고통스럽게 자신의 분야을 연구하라는 말인데 교육부가 교수들을 들들 볶으면서 그냥 고통스럽게만 만들고 있으니 학문발전이 될 리가 없지.
아인슈타인이 살아서 한국에 왔다고 해봐. 어느 대학에서도 못 붙어있을 거야.” 교육당국이 논문발표 실적을 교수들의 평가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평생 17편의 논문밖에 쓰지 않은 아인슈타인이 제 아무리 실력이 있다한들 한국서 배겨나기 어려웠을 거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아야 해. 한가한 어느날 저녁 하늘을 보고있다가 ‘빛의 속도로 비행기를 타고 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생각에 미친 것이 세상을 바꾼 상대성원리의 출발이 됐잖아. 그만큼 학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가가 중요한거요.” “교수나 박사라고 모두 똑똑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엉터리 교수도 많고 일부에서는 교수망국론, 박사무용론도 나오는데, 검증과 평가는 해야하지 않습니까”고 말꼬리를 한 번 더 잡아보았지만 “학교에 맡기면 검증은 스스로 돼”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학생을 학생으로 보지않고 학생 머리 하나를 500만원짜리 돈뭉치로 보는 대학운영자들이 많지만 그런 대학은 조만간 도태될 것이니 문제가 안돼”는 말이 이어졌다. “그보다는 대학이 시장바닥된 걸 걱정해야 해. 왜 교수가 벤처사장이 되어야 하나.
학교 분위기가 온통 장사속으로 돌아가잖아. 학문은 언제 해. 자기 학문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고 다른 이론과 붙여보고 그러면서 새 이론이 나오고 새 학설이 성립되고 노벨상을 받을 만한 신물질도 개발되는데 교수들이 앞장서서 벤처 벤처 하니 학문이 제 길을 갈 리가 없지.”
“한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은 그 나라의 정치수준에 비례”
“대학을 대학답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아. 어떤 이가 장관임명되는 걸 보니 참 기가 막히더구만. 청와대에서 정식발표 3~4일 전에 당사자에게 장관될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통보하면서 발표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했으니 무슨 준비를 할 수 있었겠어. 물론 3~4일 말미가 더 있다고 해서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만 당일 취임해서야 부처조직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알 수 있었으니 장관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지.” “아직도 그런 식으로 장관을 임명하고 있다면 우리나라 장관들 큰 문제지, 큰 문제야!” “이게 우리나라 수준이야, 학교에 쓸 돈 없다지만 정치하겠다고 출마한 사람들 좀 보소, 없다는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온통 돈으로 난리법석이야. 정치가 저러니 학문이 발전될 턱이 없지.”
■ 김용준이 말하는 그와 그의 가족이야기
그는 김용옥(金容沃)의 형이다. 전에는 김용옥이 그의 동생으로 소개됐지만 도올이 이름을 얻으면서 이제는 그가 김용옥의 형이다. 그래도 그에게 김용옥은 ‘그 아이’다.
“걔하고 나하고 나이차가 20년이 넘어. 내 큰 아이와 동갑인데 럭비공같지 않아.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니. 내 동생이 아니면 ‘재미있는 녀석 하나 나왔다며 맘놓고 TV강의를 봤을텐데 동생이니까 보지 못하겠더라고.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실수나 하지 않을까 해서.” 내내 격앙됐던 목소리가 동생이야기에 이르자 웃음과 함께 온화하게 바뀌었다. (그는 4남2녀중 맏이다. 그를 포함 5명이 박사로 김숙희 전 교육부장관이 누이동생이며 김용옥은 막내다. 그가 둔 4남1녀중 2 명이 또 박사다)
그가 한때 앞장섰던 ‘신과학운동’이 어떤 점에서는 ‘노장(老莊)’과도 맞닿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혹시 형제간에 교감이 있지나 않았는지’가 궁금했다. “걔야 전공이 노자지. 그걸로 논문을 썼으니까. 내가 했던 신과학운동은 과학을 물질의 물리 화학적 특성에만 맞춰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과 역사의 흐름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었지. 말하자면 ‘인간성의 과학’을 연구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지. 신과학운동의 선구자격인 일리야 프리고진이라는 외국학자가 있어. 83-84년께 과학자산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몇 사람이 그 사람 책을 같이 읽은 적이 있지. 그때 걔도 그 자리에 와서 책을 함께 읽었지. 그 뒤로는 같이 책을 읽은 적이 없어.”
김용옥은 1994년 출간된 장형의 ‘사람의 과학’의 서문에서 ‘나의 젊을 때는 큰 형 흉내내기의 연속이었다’고 털어놓으면서 ‘우리 형이야말로 20세기 한국역사에서 과학을 과학으로만 보지않고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다리를 놓은, 한국 최초의 사상가’라는 헌사를 보냈다. 김용옥의 헌사는 ‘사회참여를 실천한 자연과학자’로 번역될 때가 많다. 교수시절 두번이나 해직된 이력은 이 번역이 틀리지 않음을 말해준다. 군사독재 시절 사회과학도가 아닌 이공계 교수가 정치적 이유로 해직됐던 사실은 그가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골임을 보여준다. 그는 또 함석헌선생이 창간했던 ‘씨알의 소리’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부동산투기가 망국병의 근원으로 지탄받던 1990년대 초에는 ‘토지학교’교장으로 부동산투기의 폐해를 막는데 노력하기도 했다.
1993년 고려대에서 정년퇴직, 명예교수로 물러난 후에는 과학과 종교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데 몰두해왔다. ‘과학없는 종교는 미신에 불과하고, 종교없는 과학은 흉기’라는 믿음은 교수시절 내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화두였다. 한때 편집을 책임졌던 계간지 ‘과학사상’에 ‘종교와 과학’을 연재하고 있으며, 수원대학과 감리교신학대학에서도 이를 주제로 강의를 맡고 있다. 작년부터는 대우재단산하 학술협의회 이사장을 맡아 기초분야 전공자들에 대한 지원방안을 찾고 있다. 얼마전에도 백운대에 올라갔을 정도로 건강은 하지만 체력이 예전같지 않다. 움직이는 것보다 가만 있는 게 더 좋아지는 나이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여태껏 쓰고 번역해온 책중 독일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했다. “첫번째 해직됐을 때 번역한 것인데 지금도 읽으면 배울 것이 자꾸 생겨나. ‘과학자에게 있어 철학적 배경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가다듬는데 언제나 도움이 되지. 책장사 같지만 요즘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만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 약력
1927.10.23일생
서울대 공대 화공학과 졸업(1952)
천안농고 교사(1952~1955)
미국 텍사스 A&M대학교 대학원 박사(1965)
고려대 화공학과 교수(1965)
1차 해직(1975)
2차 해직(1980)
고려대 정년퇴직·명예교수(1993)
학술협의회 이사장(1999-현재)
●주요저서
‘과학·인간·자유’(1979) ‘과학인의 역사의식’(1986) ‘혼돈과 질서’(1998) ‘현대과학과 윤리’(1988·공저) ‘사람의 과학’(1994) ‘갈릴레오의 고민’(1995) ‘종교와 과학’(2000·공저)
●주요역서
‘부분과 전체’(하이젠베르크) ‘인간이란 동물’(르네 듀보) ‘내재하는 삶’(〃) ‘지식의 대변자’(〃) ‘우연과 필연’(자크 모노)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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