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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주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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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주철환

입력
2000.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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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의 고모 주분단 여사아들의 키가 내 어깨쯤인가 싶더니 어느새 내 눈높이까지 침범했다. 여름방학 때가 되면 내가 그를 올려보아야 할 게 분명하다.

내겐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모두 다섯 번의 졸업식을 갖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오시지 않았다. 당시엔 당연한 일로 여겼기 때문에 서운하다는 생각조차 품지 않았다.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 기억도 없다. 방송사에 들어간지 일년도 채 안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는 택시 안에서 내가 가졌던 감정은 슬픔이라기보단 연민에 가까웠다.

내가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그 후 아버지는 줄곧 방랑자였다. 서울에서 마산까지 내려온 고모님(주분단·87)은 중학교 삼학년부터 네 살 코흘리개까지 다섯 남매의 살아갈 길을 걱정하시다가 그 중 하나를 데려다 키우기로 마음먹으셨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막내보다 생글생글 웃기 잘하는 내가 서울행 기차를 탈 수 있었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 남매들 중 유일하게 내가 사투리를 쓰지 않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일찍 과부가 된 여동생에게 아들을 맡긴 아버지는 일년에 서너 차례 미안한 표정으로 들르셨다. “나는 아무 소용 없다. 단지 고모를 마음아프게 해선 안 된다.”아버지는 이 말씀 외에 내게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돈암동 시장에서 서너평짜리 가게를 하며 고모님은 나를 키웠다. 함경도 또순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고모님은 강하고 억척스러웠다. 일층은 가게, 이층은 살림집이었는데 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고모님이 아주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다닐 땐 일년 중 두 날이 고통스러웠다. 환경조사서를 써내는 날과 가정방문하는 날이었다. “집에 텔레비전 있는 사람 손 들어 봐”하는 식의 질문과 함께 “엄마 없는 사람 손 들어 봐”하는 비교육적 질문도 있었다. 텔레비전 없는 건 하나도 속상하지 않은 데(당시엔 거의 없었다) 어머니의 부재는 몹시 부끄러웠다. 다른 학부형과 담임선생님이 면담하며 “쟤가 그 엄마 없는 애라죠”하며 나누는 낮은 목소리가 철없는 내겐 천둥소리처럼 다가왔다.

고모님과 함께 산 지 스무해 가까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법적으로 고모님의 양자가 되었다. 실질적인 어머니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입양에 관해 말해준 이가 없었던 까닭이다. 대학원을 마치고 군대에 갈 무렵이 되자 주변에서 “호적에 올리면 군대에 안 가도 될텐데”라고 말해주어서야 그 일이 진행되었다. 곡절 끝에 나는 현역으로 입대했지만 그걸 계기로 나는 고모님의 떳떳한 아들이 되었다.

내가 하마터면 조PD가 될 뻔한 사연을 공개한다. 고모님이 원래 조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셨는데 안타깝게도 서른 즈음에 고모부가 돌아가셨다. 한번도 뵌 적이 없지만 만약 고모부가 살아계셨더라면 나는 주PD가 아닌 조PD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고모부가 계시고 사촌형제들까지 있었더라면 서울에 올라오지도 않았을지 모르지만.

돈암동 가게를 팔고 신당동의 허름한 여관으로 이사할 때 나는 열여섯살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후 ‘지금은 없는 열여섯살 적 나에게’라는 수필이 교지에 실렸는데 교수가 된 이 봄에도 ‘열여섯살 적 나’는 여전히 내 속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만큼 나의 열여섯살은 고단했고 대단했다. 상상력이 속도의 급류를 타면서 시인 흉내도 내고 TV 속도 마음껏 드나들었다. 물론 마음 속 수줍은 창을 통해서였을 뿐이지만.

나는 아들을 친구처럼 키운다. 아니 키운다기보다 그런 식으로 자라고 있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팔씨름을 했는데 ‘머지않아 나를 이기겠구나’라는 걸 강하게 느꼈다. 아버지인 나보다 영으로나 육으로나 강하게 자라길 희망한다. 강릉대 교수인 아내와는 주중에 전화로만 대화한다. 시시콜콜 하루 중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게 잠자기 전 우리 부자의 일과가 된 지 오래다.

“아버지가 제게 해준 게 뭡니까.” 아마 세상의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들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말일 것이다. 아버지에게 딱 한번 이 말을 거칠게 쏟아냈다. 아버지가 우시던 기억이 난다. 아, 그때 나는 왜 그처럼 유치하고 잔인했을까.

PD로 첫연출한 프로그램의 부제가 ‘아버지’였다. 주제곡으로 유지연이라는 가수가 부른 ‘아버지’라는 노래를 썼는데 그 가사가 이렇게 시작된다.

“거울 속으로 비쳐지는 나의 모습을 보았지. 어느새 거기에 서 있는 모습은 나의 아버지. 세월이 흘러서 이젠 나도 아버지….”

어릴 때 몹시 눈을 깜박거리던 버릇이 있었는데 그 증세가 심하자 아버지가 나를 병원에 데려간 일이 있었다. 면도를 하다가 거울 속의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문득 “아버지, 지금 깜박거리지 않고 살게 된 건 아버지 덕분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 눈 속에 아버지가 계신다.

● 주철환은 누구

1955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고교 교사를 거쳐 문화방송(MBC) PD로 입사해 ‘퀴즈 아카데미’‘TV청년내각’‘일요일 일요일 밤에’ 등을 연출했다. 최근 방송국 생활과 강단에서 겪은 일 등 지나온 삶을 진솔하게 풀어놓은 자전에세이 ‘시간을 디자인하라 - 주철환PD의 인생 테마게임’(사람in 펴냄)을 냈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전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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