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제국24년동안 국내상영이 거부됐던 일본영화 ‘감각의 제국’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중국 상하이 마피아 ‘트라이어드’도 찾아온다. 홍콩은 몽골까지 달려가 영웅 ‘징기스칸’을 불러냈다. 저마다 자국의 독특한 정서가 진하게 배여 있다. 황토색과 핏빛과 초원의 푸르름의 차이 만큼이나 그 느낌도 다르다.
‘감각의 제국’은 포르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적나라한 실제 섹스 장면,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행위의 반복이다. 제작비를 댄 프랑스 아나토르 도만사는 오시마 나기사(大鳥渚) 감독에게 포르노 한편 만들자고 제안했고, 1976년‘감각의 제국’은 탄생됐다. 당연히 ‘금기’ 였다. 일본에서조차 7년동안 재갈이 물렸다. 시나리오부터 외설물로 판정 나 감독은 법정에 서야 했다.
‘감각의 제국’은 실화다. 1936년 과도과민증에 걸린 기생 아베 사다(마츠다 에이코)가 허무주의자인 요정 주인 이시다(후지 타츠야)와 탐닉적이고 도착적인 섹스를 벌이다 못해 그를 살해하고 성기를 절단한 사건을 소재로 했다. 수입사는 등급 심의를 위해 당연히 가위질을 했다. 원판에서 18분을 잘랐고 그래도 모자라 성기 노출 부분은 가렸다. 그래서 영화는 곳곳에서 끊어지고, 급하게 지나간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냥 “이런 영화가 있었다”는 소개 수준이 됐다.
‘감각의 제국’(시카고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이 단순한 싸구려 상업포르노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은 이유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처럼 이런 금기에 대한 충격적 도전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제작 당시 시대상황과 감독의 배경, 영화 속 몇몇 장면과 뛰어난 일본 정서의 미학적 표현들에 의해 더욱 정당성을 얻었다. 남자주인공의 허무주의적 자기함몰은 산업화사회의 소외의식으로 읽혔고, ‘성의 명백한 표현’은 일종의 정치적 비판과 공격이었다. 이런 해석은 이미 방향을 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도쿄대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했고, 1960년대 그의 영화가 좌파적 계급투쟁이나 일본사회의 환멸을 담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에서 군인들이 행진하는 역방향으로 남자주인공이 어슬렁거리다 섹스에 매달리는 단 한장면을 놓고 이 영화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조롱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24년이 지난 지금 ‘감각의 제국’에서 그런 의미를 찾으라고 요구할수는 없다.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냥 가장 일본적인 포르노그라피에 불과할 수 있다. 노골적이고 변태적인 성의 표현이 이제는 금기도, 호기심의 대상도, 정치적 공격으로서의 의미도 갖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나마 상처투성이인 ‘감각의 제국’은 ‘거짓말’처럼 ‘충격’이 아닌 ‘역겨움’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4월 1일 개봉. 오락성★★★☆ 예술성★★★
■트라이어드
‘트라이어드’는 장이모 감독이 1930년 상하이 마피아 조직에 갇힌 한 여인에 대한 연민을 담았다. 그 여인을 14살의 시골 소년 슈셍(왕샤오야오)의 눈이란 순수의 창(窓)을 통해 본다. 왜 마피아이고, 소년의 눈일까. 의문은 영화 중간쯤 가면 풀린다. 일종의 거부감. 마피아 세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그들의 음모와 배반과 살인의 비정함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타인의 순수를 얼마나 파괴시키는 가에 있다. 소년의 눈은 그것을 더욱 아프고 크게 드러낸다.
순수를 잃고, 그 잃어버린 순수를 끝내 되찾지 못하는 여인은 상하이 최대 마피아 조직 ‘그린’의 대부(리바오티엔)의 정부인 클럽 여가수 보배(궁리)이다. 그녀는 미움, 신경질, 오만함, 불안감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몸종이 된 슈셍은 처음에는 권력자의 자기과시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심지어 그녀가 두목의 의형제와 저지른 불륜조차, 빼앗긴 순수와 자유를 향한 자학적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소년은 여인의 눈물과 아름다움을 본다. 그것은 일주일이란 시간으로 충분하다.
때문에 ‘트라이어드’는 슬픈 영화이다. 그들은 총알이 난무하고 피가 흥건한 할리우드의 마피아보다 훨씬 잔인하다. ‘대부’의 마이클(알 파치노)이 보여주던 연민조차 없다. 거짓 부상을 핑계로 외딴 섬에 은둔한 두목이 결국은 배신자(두목의 의형제)를 찾아 제거하고,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섬에 사는 과부와 그의 남자까지 죽인다. 살인보다 더 섬뜩한 것은 인간성과 영혼을 파괴하는 마피아 조직의 생리이다. 영화는 죽은 과부의 어린 딸이 미래의 보배로 성장하게 될 것을, 슈셍 역시 보배가 준 동전이 강물에 빠져버리듯 순수를 잃어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이 바로 장이모 감독이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그늘인지도 모른다.
장이모 감독은 당시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보다 색조와 의상, 분위기로 상징화했다. 유려하게 담은 아름다운 섬의 풍경과 노을은 보배의 잃어버린 순수에 대한 원형이자, 마피아 세계의 비정함에 대한 강조이다. 노래할 때의 공리는 요염하고, 자학할 때의 공리는 애처롭고, 배신당했을 때의 공리는 처연하다. 1995년 프랑스 자본으로 만들었다. 그 해 LA와 뉴욕 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촬영상을 받았다. 25일 개봉. 오락성★★★ 예술성★★★★
■징기스칸
활극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영웅을 좋아하는 홍콩영화가 ‘징기스칸’이란 인물을 선택했으니. 그러나 몽골출신 부부감독 사이푸와 말리시는 북경 영화학교 출신답게 동양적 휴머니즘과 가족관으로 한 영웅을 서술해 간다.
징기스칸을 그린 영화는 처음이 아니다. 1993년 몽골 거장 백진 바르지남의 ‘징기스칸’이 있었다. 그 영화가 실크로드를 넘어 지중해까지 로케이션을 감행하면서 징기스칸의 일대기를 통사적으로 조명했다면, 이번 ‘징기스칸’은 시대를 좁히고, 시각을 좁혀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 테무진(튜멘)이 탄생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가 어떻게 출생해서, 어떤 과정을 겪으며 성장했으며, 어떤 깨달음을 거쳐 징기스칸이 됐나. 누가 그에게 깨달음과 가르침을 주었는가.
당연히 영화는 징기스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에 무게를 둔다. 그리고 위대한 인물 뒤에는 항상 위대한 어머니 헐룬(아일리야)의 가르침과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에피소드를 통해 확인시킨다. 출생의 은인을 적이라는 이유로 죽였을때, 음모로 아버지가 희생되고 가족이 부족으로부터 추방당해 절망할때, 인질로 잡혀간 약혼녀 보에티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할 때, 첫 전투에서 패했을 때, 용서와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어머니. 그래서 ‘징기스칸’은 어머니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한 영웅의 마음이 열고 사랑과 생명으로 세상을 다스리게 만든 것은 결국 초원처럼 넓은 가슴을 가진 어머니였다. 이 자체가, 징기스칸을 휴머니즘 넘치는 정복자로 미화하는 방식이다.
광활한 몽고 초원에서 촬영했고, 모두 현지배우들을 강요했고, 8,000명의 엑스타라도 동원했다. 유목민족의 거친 성격과 호전성을 전투장면의 빠르고 느린 화면의 교차로 살려냈다. 그렇다고 할리우드식의 화려한 스펙터클이나 홍콩식 과장을 기대하면 큰 착각. 영상과 연출과 서술이 촌스러울 만큼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98년 필라델피아 국제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 4월 1일 개봉. 오락성★★★ 예술성★★★ (★5개 만점 ☆은 절반, 한국일보 문화부 평가)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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