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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기행] (11) 조선사절의 뱃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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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기행] (11) 조선사절의 뱃길을 따라

입력
2000.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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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은 9월 28일 지난에서 북쪽으로 40리 길, 다칭허(大淸河)를 건너 치허현(齊河縣)에 닿았다. 지금 다칭허는 사라지고 없다. 다칭허가 황허(黃河)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칭허가 황허가 되었는가? 장수성 북쪽을 지나 황해로 흐르던 황허가 1855년 허난성 지역의 범람으로 물줄기를 북쪽으로 틀면서 지난과 치허 사이의 다칭허를 덮쳐 버하이(渤海)로 물길을 바꾼 것이다. 다칭허는 옛 황허의 물줄기로, 589년 황허가 남쪽으로 물줄기를 옮긴 후 1,200여 년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사절들은 먼 뒷날 황허로 변할 다칭허의 다리 다칭교(大淸橋)를 건넌다. 다리를 지나면 바로 치허현의 동문(東門)이다. 지난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길목의 첫 다리가 다칭교이다. 다칭교는 역시 산둥 명교(名橋)의 하나로, 1555년 세워진 홍문(虹門·아치) 9개의 돌다리이다. 홍익한보다 약 10일 쯤 뒤늦게 이 다리를 건넌 김덕승은 “다칭교는 다칭허에 놓인 9홍문의 돌다리, 다리 아래로 돛단배가 오가며 강가에는 질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연행도폭’의 15번째 그림 ‘치허현도(齊河縣圖)’를 보면…. 다칭교가 정확하게 9홍문, 다리 위에 서로 다른 모습의 행인을 그리고 다리 아래에는 돛단배가 지나고, 강가에는 돛을 내린 배 여러 척이 정박하고 있다. 다칭허의 실경을 ‘연행도’ 화첩의 여느 그림처럼 꼼꼼하게 그려 놓았다. 이 그림은 1855년 황허가 삼켜버린 다칭교의 이 세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그림인 양 싶다. 세상에는 남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가 하면 우리가 잃은 소중한 것을 남이 갖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1973년 황허의 수재(水災)를 피하기 위해 현소(縣所)가 북쪽 11㎞의 옌청진(晏城鎭)으로 옮겨져 옛성터는 샤오저우향(小周鄕)이란 시골 한구석에 있으나 사방은 온통 밭이고 농가 몇 채가 띄엄띄엄 있을 뿐, 바로 옆에는 황허가 무심히 흐르고 강 건너 가물거리는 것은 지난 시내이다. 800년이나 되었다는 옛 성터의 흔적은 전혀 찾을 길 없다.

치허현에서 곧 바로 북상해 위청시(禹城市), 핑위엔현(平原縣)을 지나면 운하의 도시였던 더저우(德州)에 닿는다. 위청 시내에서 서북쪽 5㎞, 스리왕회족향(十里望回族鄕·회교도 마을)에 우(禹)임금을 모신 ‘우왕정(禹王亭)’이 있다. 핑위엔현은 후한(後漢) 시절 유비(劉備)가 현령으로 있다가 사찰 나온 독우(督郵·감독관)를 장비가 폭행하고 유비, 관우, 장비가 함께 야반도주한 곳이다. 필자는 명군(名君) 유비의 후예인 핑위엔현 정부에서 뜻밖에 푸대접을 받았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현지(縣志)를 사기 위해 들렀더니 바쁜 길손을 기다리게 하고 한참 동안 왈가왈부하다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딱 한마디 ‘빠오미(保密·비밀유지)’이다. 공개출판·판매하는 지방지(地方志)가 어째서 비밀문건인가! 북으로 읍내를 벗어나자 바로 큰 길가에 쪽빛 가을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높다란 전탑(전塔)이 나타난다. 때마침 지는 해의 주홍빛 잔광이 탑신에 비쳐 일순 정토의 세상처럼 황홀했다. 읍내에서 겪은 이승의 번뇌는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청나라 때인 1677년 세운 미륵암천불탑(彌勒庵千佛塔)이란다. 탑신은 7층 8각형, 4면에 창(窓)이 있고 높이는 26m이다. 산둥성 서부지방의 유일한 고탑이다. 홍익한 등 조선사절이 이곳을 지난 50여년 뒤에 세워진 것이다. 고인(古人)이 못 본 것을 나는 봤다.

초저녁에 더저우에 도착했다. 더저우는 산둥성 북쪽 끝에 있는 옛적부터 이름난 운하의 스테이션으로 당시 수도 베이징으로 보내는 미곡(米穀)의 거대한 저장창고인 더저우창(德州倉)이 있어서 경제·군사적으로 요지이다. 한편 조선사절에게는 베이징으로 가는 길의 갈림길(운하와 육로)이기도 했다. 홍익한은 육로로 갔다. 당시 중국의 동맥인 거대한 경제도시 더저우는 한편 술과 여자가 흥청대는 환락가이기도 했다. 홍익한의 눈에 비친 더저우의 환락가…. “도처에 청루(靑樓)와 주점이 있고 그 속에서 노랫소리, 풍악소리 요란하고 사내와 계집들은 손을 마주 잡고 놀아난다. 운하 위에는 울긋불긋한 놀잇배가 즐비하고 사대부들이 탄 배는 누각을 만들어 붉은 난간과 오색 창문이 물 위에 휘황하다. 사공들은 뱃줄을 잡아 다니며 뱃노래를 부르고 어여쁜 아가씨들은 뱃전에 앉아 술을 권하니 완연히 한 폭의 그림이다.” 뒷날 삼학사의 으뜸으로 청나라에 맞서 순국한 홍익한이 젊은 날에 쓴 싱그러운 한 대목이다. 한편 운하길로 간 조즙은 더저우를 지나 안링(安陵)이라는 운하가의 마을에서 절세의 미인을 보고 짝사랑의 농밀한 러브스토리를 썼다.

“새벽녘에 안링(安陵)에 닿으니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매우 쌀쌀했다. 상통사(上通事) 조안의(趙安義)를 불러 강가로 내려가서 술을 사오도록 했다. 매우 번화한 고장이다. 강가의 어느 집의 붉게 칠한 대문이 한 쪽은 닫혀 있고 한 쪽은 열려 있다. 대문 위에 채색으로 단장한 이층, 양쪽 창문에 붉은 발이 드리워져 있고 15, 6세쯤 되어 보이는 한 아가씨가 치장하고 이층으로 올라와서 발을 걷어올리고 밖을 내다본다. 달처럼 도톰한 볼에 별빛 같은 눈동자! 그 요염한 자태는 선녀인 양 싶었다. 발을 걷어올릴 때 우리 일행 중의 군관과 통역들이 배 네 척에 나누어 타고 일제히 문 앞으로 배를 댔다. 그 아가씨는 방안으로 몸을 숨기고 한 손으로 발을 걷어올리어 고리에 거는데 가냘픈 손 모양은 마치 봄철의 움파처럼 백옥처럼 하얗다. 한 손으로 발을 걷어올리지만 고리에 잘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얼굴을 반쯤 드러내 천천히 올려 다는데 수줍어하는 태도가 기막히게 아름답다. 발을 걷어 맨 뒤에 잠시 윗몸을 드러내 벽에 기대고 서 있다. 통역에게 그 아가씨 집에 가서 술을 사오도록 한 것은 한참 동안 말을 걸게 해서 그 어여쁜 모습과 태도를 보려 한 것이다. 통역이 문 앞에 가서 주인을 부른 즉 그 아가씨는 몸을 숨겨 달아나고, 할멈을 시켜 술을 팔았다. ‘어여쁜 이를 구했는데 이런 곱사등이를 만났다’는 옛말 그대로이다. 한번 본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으니 이런저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참으로 서운했다. 알고 보니 주(朱)씨 집 딸인데 아직 미혼으로 꼭 돈 많은 사내를 기다린다 한다. 그 붉은 이층집을 바라보다가어쩔 수 없어 배는 떠나고 말았지만 눈이 그리로만 가고 마음에 응어리가 진다. 저녁에 리엔워(連窩)읍에 닿았다. 동쪽 ‘안링’을 뒤돌아보건만 벌써 40리나 먼 곳이다. 오늘밤 머무는 이곳에도 야한 옷에 치장한 거리의 여인들은 많지만 아침에 본 그녀에 비하면 하늘과 땅일 뿐이다.”

마치 세필(細筆)로 촘촘하게 그려진 멋진 미인도를 보는 것 같고 또 기승전결이 잘 짜여진 콩트의 명품 같기도 하다. 돈 많은 사내를 기다린다니, 예나 지금이나 ‘사랑의 미약(媚藥)’은 돈이런가!

/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 명지대·LG연암문고 협찬

■연행도

관동대 박태근 객원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정간씨가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사고에서 찾아낸 조선중기 기록화 「연행도폭」(燕行圖幅)은 1624년 조선 인조의 왕권을 승인받기 위해 바다 건너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李德泂)·홍익한( 洪翼漢) 일행의 행적을 담은 국내 유일의 바닷길 연행 화첩입니다. 낙장이나 파본 하나 없는 25장의 그림은 평북 곽산군의 선사포(宣沙浦) 항을 떠나 베이징(北京)에 이르는 사절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조선 중기 회화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

■[연행도기행] 더저우는 한때 베이징 '쌀독'

베이징과 저장성(浙江省)의 항저우(杭州)를 잇는 장장 1,860여㎞의 인공운하를 이름하여 ‘경항(京杭)대운하’, 준말로 ‘대운하’라 한다. 대운하는 만리장성과 더불어 중국사의 가장 거대한 구조물이다. 수(隋) 왕조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 605년에 대운하를 파서 개통시켰다. 그 뒤 계속 발전해 원 나라 때에 대운하가 완성되고 명 나라 때 대운하의 활동은 정점을 이뤘다. 중국 대륙의 중심인 남북의 교통, 물류(物流)를 전적으로 대운하가 맡은 것이다. 연간 400만석의 곡물이 남쪽에서 수도 베이징으로 수송되는데, 그 거대한 저장고가 남쪽에서 차례로 화이안(淮安), 쉬저우(徐州), 린칭(臨淸),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저우(德州)이다. 더저우에 집하(集荷)된 곡물은 곧 바로 베이징에 수송된다. 더저우는 수도 베이징의 쌀독인 셈이다. 더저우는 운하의 경기로 명, 청 때에는 더 없이 번성했으나 19세기 말부터 운하의 시대가 마감되면서 그저 그런 지방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연행도폭’의 18번째 그림을 보면 오른쪽에 더저우성이 있고 성문은 서문(西門)이다. 성문은 한 쪽이 열리고 한 쪽이 닫힌 ‘반개반폐(半開半閉)’의 방식으로 그렸다. 서문 앞은 더저우의 운하 스테이션 격인 ‘안더수역(安德水驛)’이다. 조하(漕河)와 운하는 같은 말이다. 물 위에 돛단배 서너 척이 떠있는데 한 척은 누각이 있으므로 바로 홍익한이 말한 놀잇배이고, 나머지는 조선(漕船·운반선)인 듯 싶다. 강가에는 배 여러 척이 돛을 내린 채 정박하고 있다. ‘南京孔道’란 정문(정門)은 베이징에서 당시의 부수도인 난징에 이르는 대로라는 뜻이다. 왼편에 가로 놓인 집들은 상가 같으며 상호를 알리는 깃발이 걸려 있고 안에는 사람, 기물(器物)이 듬성듬성 보인다. 아주 세밀한 화법이다. 지금의 더저우 운하는 뱃길이 끊긴 폐운하로 강가에는 쓰레기더미가 쌓여있고, 물은 시커먼 구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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