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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칼럼] 누가 '썩는 밀알'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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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칼럼] 누가 '썩는 밀알'이 될까

입력
2000.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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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총선은 2000년대를 여는 첫선거라는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우리의 민주역량을 확대하는 뜻깊은 선거가 될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강조해 왔다. 문민정부 탄생에 이어 정권교체까지 이루었으니 오랜 세월 왜곡됐던 선거문화가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선거사상 처음으로 시민단체들이 ‘공천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유권자혁명’에 대한 기대가 부풀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감정 바람이 유권자혁명의 기대를 허물고 있다.오늘 선거판을 휩쓰는 지역감정의 본질은 무엇일까. 무엇이 지역사람들을 똘똘 뭉치게 하고, 어제까지 지역감정을 개탄하던 사람들을 한순간에 홱 돌게 하는 걸까. 나는 그 본질이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지역감정은 보다 순수했다. 내고장 인물을 키우자는 열망, 경쟁심, 우리도 한번 뭉쳐보자는 생각이 본질이었다. 그정도의 지역감정은 세계 어디나 있는것이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욕심이 개입된 오늘의 지역감정은 간단치 않다.

지금 정치인들은 서로 삿대질하며 지역감정을 악화시킨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누가 지역감정을 심화시켰고, 최대 수혜자는 누구며, ‘수괴’는 누구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치고 지역감정의 수혜자 아닌 사람이 있는가. 또 지역감정을 이용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나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파란만장한 세월속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은 이념이나 계층에서 온것이 아니고 특정지역의 지지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지역민을 볼모삼아 흥정하고, 그 흥정을 뒤집기도 하며 오늘까지 왔다.

지역사이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던 지역감정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심으로 악화시킨 가장 큰 요인은 편중인사였다. 지난 40여년동안 한 지역 출신이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곧 그 지역사람들이 권력의 노른자위를 독식하는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됐다.

내고장 인물을 키워보자는 열망이 권력의 떡고물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으로 변질됐다. “00도 정권아래 00도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독식하고 있다”란 한마디 앞에서는 온국민이 이성을 잃게 됐다. 산전수전 겪은 정치인들은 무슨 말을 해야 유권자들이 끓어오르는지 잘 알고 있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을 떡고물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는 비열한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역감정을 완화시킬수 있을까. 나는 어떤 정권이든, 어떤 지역이든, 뼈아픈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면서 ‘썩는 밀알’이 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치유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사회의 관혼상제 문화와 비슷한 것이다. 오늘의 관혼상제 문화는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으로부터 멀리 빗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시간적인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폐단을 절감하면서도 그 풍토가 개선되지 않는 것은 개인적인 손해를 감수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이웃의 관혼상제에 축의금 부의금을 보냈으니 나도 그들의 축하나 조문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어떤 시점에서 일제히 바꾸지 않는다면 관혼상제 문화는 달라질 수 없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아니하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누군가 썩는 밀알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이 정권이 못한다면 다음 정권이 해야 한다. 어차피 이번 총선은 김대중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와 2002년 대선을 향한 전초전의 성격을 피할 수 없다.

정치인들이 대선의 포석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유권자들이 말려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제 더이상 노른자위나 떡고물 독식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썩는 밀알’이 되라는 압력만이 거세질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우리지역에서 다음 정권을 창출하자. 그리고 우리는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역사에 길이 남을 밀알이 되자”라고 호소하는 정치인, 그에게 박수치는 유권자를 보고싶다. 그런 선언 없이는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발행인 장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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