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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틈' 그 속에 포용의 미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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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틈' 그 속에 포용의 미덕이...

입력
2000.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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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조 시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요즘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들이 틈을 보인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기다렸다는듯이 그 틈을 헤집고 들어와 마침내 한 존재를 허물어버릴 의도적, 비의도적 기도가 사위에 미만해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틈을 보이지 말자!’. 시인도 이런 다짐을 한다. 그러나 그런 다짐은 시인의 몫이 아니다. 스스로 틈을 내보여, 스스로를 허물어 버림으로써 오히려 타인의 깊이에 다다라야 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몫이 아닐까.

임영조(55) 시인은 그 틈을 이렇게 말한다. ‘금간 보도 블록 사이로 촉을 내민/ 풀씨가 더 눈물겹고 환하듯/ 틈으로 엿본 생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말의 틈은 흠이라지만/ 사람의 흠은 그의 생을 정독할/ 자상한 각주 같은 것이니/ 더러는 틈을 보이며 살 일이다/ 밖으로 나가려면 문을 열듯이/ 안으로 들이려면 틈을 내줄 일이다’(‘틈’ 부분)

‘사람의 흠은 그의 생을 정독할 자상한 각주’와 같은 표현은 세상과의 ‘화끈한 통정’을 꿈꾸는 임씨 같은 시인의 몫이다. 그의 다섯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민음사 발행)는 이렇게 세상을 관조하고 열린 마음으로 인간사와 사물을 풀어낸 시편들로 가득하다. 올해로 등단 30년, ‘현대문학상’‘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원숙한 시인의 지혜가 곳곳에서 빛난다. 그의 시구처럼 ‘가득함을 죄다 비워낸 자의 넉넉함’이다.

그의 언어는 기교를 기도하지 않는다. 사람은 물론 사물과 술술 대화를 나누듯 열린 자세에서 깨달은 삶의 의미, 그 대화과정의 진술이 그대로 시로 표현된다. 늦가을 낙엽되어 떨어지는 나무의 이파리들을 보면서 그는 ‘그 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고 말해준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누이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아하! 무릎 칠 때는 이미 늦가을’(‘늦가을 문답’부분)

어느새 생의 늦가을에 접어든 시인이 알려주는 꾸밈없고 솔직한 탈속의 자세이다. 그는 이런 자세로 가지를 잘린 포도나무들을 보고는 ‘팔 뻗어 서로 당겨보려는/ 저 아픈 팽팽한 혈연의 조짐’이라고 느끼고, ‘시뻘건 연옥에서도… 열반에 들듯 태연’한 가스렌지 위의 고등어를 보고는 고등어는 역시 高等魚(고등어)라고 익살섞인 표현을 하기도 했다.

임시인은 “남루한 집이나마 이번 시집이 나처럼 등이 시린 사람들이 두루 찾는 아랫목같이 따뜻한 시집으로 기억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후배 정호승 시인의 표현처럼 이번 시집은 그가 내보인 ‘틈의 진경'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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