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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에 우리가 사네] (17)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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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에 우리가 사네] (17)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

입력
2000.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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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답사]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경북 문경시 관음리 마을에서 출발하는 자전거는 하늘재(관음리-미륵리)를 넘고, 지름재(미륵리-수안보)를 넘고, 소조령(수안보-괴산)을 넘고 마지막으로 문경새재를 넘어서 다시 관음리 마을로 돌아올 참이다.

백두대간을 남북으로 넘어갔다가 넘어오는 여정이다. 문경새재와 하늘재에는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다. 여기는 자전거의 낙원이고 높은 고개들을 잇달아 넘어가는 자전거의 지옥이다. 오르막에서 지친 몸이 내리막의 바람 속에서 다시 살아나 자전거는 또 다른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오르막이 끝나는 고갯마루 쪽을 아예 잊어버리고 길바닥에 몸을 갈면서 천천히 나아가야만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마음 속에서 고개를 넘는다는 일은 삶의 전환과 확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고갯마루는 그 전환의 통과의례로서 괴기스런 전설과 민담을 빚어낸다.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대로는 서울-충주-상주-부산을 연결하는 조선 500년의 간선도로였다. 행정과 교역의 대부분이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이루어졌다. 영남대로 380㎞ 중에서 옛 문경새재 구간은 30㎞에 달하고, 이 구간의 해발고도는 600㎙이다. 문경새재는 여러 변방 오지에 흩어진 인간의 삶이 당대 현실과 관련을 맺으려 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로서 영남대로의 중허리를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그 마루턱은 늘 구름에 가려져 있는데, 그 너머 아득한 북쪽이 서울이며 거기가 당대의 핵심부이고 현실을 만지고 주무르고 죽이고 살리는 일들은 모두 문경새재 너머에서 이루어졌다.

진도의 섬 사람들은 진도아리랑의 첫 머리에서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구부야 구부야 눈물이로구나”라고 노래한다. 섬사람들이 가 본 적도 없을 내륙 험산준령의 고개를 눈물로 노래할 때, 그 노래는 인간이 당대 현실 속으로 진입해서 그 속에서 화해를 이루는 일의 고난을 일깨우는 노래로 들린다. 그 길은 굽이굽이 눈물인 것이어서, 진도아리랑 속에서 화해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몇 굽이냐?”는 굽이의 숫자를 묻고 있지 않고 거기에 바쳐야 할 눈물의 양을 묻고 있다. 그래서 그 노래는 문경새재를 지리상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고 험한 곳으로 밀어내 버린다.

지금 문경 새재에는 굽이가 없다. 길은 펴져서 구간별로 포장되었고 굽이를 이루던 옛길은 토막으로 끊어져 숲 속에 흩어져있다. 바위가 수백년 동안의 짚신 발길에 밟히고 또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구간도 있는데, 이 옛길에는 지금 ‘장원급제의 길' 또는 ‘금의환향의 길' 같은 이름표가 붙어있다.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갔던 영남 유림들은 대부분 금의환향하지 못했다. 대과(大科)는 평생의 공력을 바쳐도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고 사마시(司馬試)를 통과해서 진사나 생원의 호칭을 얻었다해도 임용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의 정치권력이나 행정체계 속에 편입될 수 없었던 그들은 포의(布衣)의 처사로서 다시 문경새재를 넘어 향촌으로 돌아갔다. 문경새재 제3관문(조령관) 쯤에 이르면, 산맥은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을 첩첩이 가로막아 서울도 고향도 보이지 않는다. 이 마루턱 쯤에 이르러 향촌으로 돌아가는 그 포의의 처사들은 세상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그 세상 속으로 기어이 뚫고 들어가려는 나 자신은 또 무엇인가, 이 세상의 구조와 질서는 성인의 가르침과 사소한 관련이라도 있는 것인가를 통렬하게 자문자답해야한다.

안동처사 유우잠(柳友潛·1575~1635)은 새재 마루턱에서 읊었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김남곡(金南谷·1599~1684)은 53세에 사마시를 통과해서 진사가 되었다. 진사가 되기까지 그는 소맥산맥을 13번 넘어갔고 넘어왔다. 급제자를 발표하던 날, 그는 서울 거리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놀았다. 그때 그는 읊었다. “삼일동안 유가(遊街)할 때 희비가 다하였고/어버이 없음을 견디지 못해 눈물이 수건을 적셨네.” 그의 글 속에서 문경새재는 여전히 인간과 현실 사이에서 넘지 못한 눈물의 고개인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울분과 가난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처절하게 응시하며 여생을 마쳤다. 산천은 아름다운 만큼 쓸쓸했고, 마을이 다하는 들판 너머에 새재는 높이 솟아 있었다.

김치관(金致寬)은 새재 넘기를 단념하고 향리에 묻힌 안동처사이다. 그의 생몰 연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매우 해학적인 문장으로 인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이 사람을 이루고자 할진대 사람의 길은 사람을 멀리하지 않나니, 사람의 이치는 각기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어, 사람이 사람됨은 남에게서 말미암지 않느니라.” 인간의 모든 문제는 새재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을 뿐이라는 그의 통찰은 아마도 오랜 새재 넘기의 고통스런 결론이었을 것이다. 조선 도로의 역사 속에서, 문경새재는 소통되지 않는 현실과 자아 사이의 상처의 표정으로 산맥 속에 걸려있다. 지금 문경새재는 적막하고, 인간과 무관해 보이는 봄이 그 무인지경의 산 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새재는 아직도 곳곳에서 인간을 포위하고 있을 것이었다.

새재 마루턱에서 날이 저물었다. 자전거는 한반 중에 출발지인 관음리로 돌아왔다. 이날 주행거리는 55㎞였다. 긴 거리는 아니었지만, 높은 고개를 잇달아 넘어와, 몸은 창자 속까지 산바람에 절었다.(기사 중 안동처사 3명을 실명으로 기술한 대목은 안동대 한문학과 이종호교수가 발굴해서 정리한 자료에 따른 것이다. 인용한 한글 번역문장도 모두 이교수의 것이다.)

/김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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