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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열전](4) 박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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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열전](4) 박철민

입력
2000.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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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의 열기가 뜨겁다. 선거감시다, 사이버유세다, 전에 없던 풍경들이 세월의 변화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배우 박철민(35)은 오히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극단 아리랑의 ‘기호 0번 대한민국 김철식’.1950-60년대를 위대한 혼자, 영원한 순수주의자로 살다 간 정치판의 돈키호테가 그를 만나 이제 피와 살을 얻었다. “이런 정치판이 계속되는 한, 정치인 지놈들은 배터져 죽을 것입니다.” 김철식, 아니 박철민의 포효에 극장은 박수와 환호로 떠나간다.

김철식만큼이나 파란 많았던 그다. 학생회 간부 활동, 민중연극판을 거쳐 이제 그는 기성 연극판에서의 착근을 꿈꾸고 있다. 번듯한 무대는 이번이 처음이라지만, 사실 그는 1985년 중앙대 경영학부 총학생회장으로 연극반을 주름잡던 대학의 명물.

“학교는 위장취업이었죠.” 대학시절 총학생회장까지 지냈던 부친의 닥달에 못 이겨 간 대학. 연극반 활동이 절정에 달한 3학년 때는 8과목이 F학점이었다. 그는 그러나 교수팬까지 뒀던 학교의 걸물이었다. 당시 평점 0.1이었으나 총학생장이라, 등록금은 면제. 말마따나 “유일한 효도”다.

1988년 노동연극 전문극단 ‘현장’에서 구로공단 인천공단 등 파업 공단에서의 무대에서 그는 인기 최고였다. 까불대고, 술 잘먹고, 언제나 만담으로, 지친 사람들의 웃음보를 터뜨렸다. 초청이 쇄도해 하루에 회사와 학교를 세 군데나 왕래한 적도 있다. ‘이바구 세상’ 때는 100명 정원의 공간에 무려 250명이 몰려와 옷이 아예 땀걸레였다.

정신없이 다니면서, 야무진 연극관이 자라났다. “일하는 사람을 주제로, 마당극이나 서사극적 형식에, 즉흥 대사로 상황을 리드하는 거죠.” 그의 표현을 빌면, ‘애드립 치는’ 현장의 연기다. 그러나 항상 생활이 문제였다.

1992년 아이가 태어나자 8개월 동안 새벽 2시~밤 9시까지 과일 행상에 나섰다. 자신이 붙어 중개상으로 변신했으나 400여만원만 날리고 폭삭 망해버렸다. 그 기간은 그러나 한 치 양보 없는 삶의 현장에서 생생한 인간들을 접한, 귀한 배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듬해부터 노동연극판을 주름잡던 그는 1999년 최종원과 번갈아 가며 펼쳤던 무대 ‘품바’로 장안의 명물이 됐다. 또 그해 연극협회가 주는 ‘좋은 연극 만들기 베스트 파이브’에서는 극단 실험극장의 ‘오봉산 불지르다’로 연기상을 수상, 민중연극에서 기성연극 배우에로의 변신을 보란듯 이뤄냈다.

무대에서, 그는 언제나 즐겁다. “연극이란 수공업적이고, 항상 가난한 거잖아요?” 이 시대, 배우라는 존재에 대한 철저한 긍정. 4월 30일까지 소극장 아리랑에서, 그의 몸을 얻은 김철식을 만날 수 있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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