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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설의 한순간] (45) 신경숙 '딸기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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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설의 한순간] (45) 신경숙 '딸기밭'

입력
2000.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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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해 봄에 남도를 여행하던 길이었다. 낯선 시내의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데 학교를 파한 소년 둘이 내 옆에 섰다. 무료하던 차라 자연 그 소년 둘을 바라보게 되었다. 한 아이가 괜히 옆에 아이의 발을 걸었다. 옆에 아이도 질세라 발을 걸어온 상대 아이의 발을 걸었다. 한 아이가 이번엔 등을 치자 다른 아이도 맞받아쳤다. 둘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한 아이가 꿀밤을 먹이면 다른 아이도 꿀밤을 먹이고 급기야는 둘의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이유도 없이 서로 치고 받고 하는 소년들은 꽤나 심각해 보였다.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으나 상황 파악이 명확히 되질 않아 머뭇대고 있는데 신호가 바뀌자 둘은 팽개쳐 두었던 책가방을 챙겨 들고선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길을 건너고 어깨동무까지 하고선 내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그때의 풍경이 내 소설 ‘딸기밭’(‘문학동네’ 1999년 여름호)에선 이렇게 등장했다.

유. 햇빛이 그녀와 처녀를 비추고 있다. 그들은 신호등을 건너려 하고 있다. 파랑과 흰 빛이 뒤섞인 하늘. 길 건너 가로변의 은행나무들에 막 돋기 시작한 연두색 잎. 잎들. 유. 그날 이후로 너를 볼 수 없었지만 망각이 진행되는 지금도 그때의 너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예전에 우리는 사랑했을까. 그렇게 표현될 수 있을까. 풍성한 너의 머리카락. 웃음소리. 부드러운 손… 어느 순간 유가 슬몃 처녀의 종아리를 발로 찬다. 처녀도 유와 똑같이 유의 종아리를 발로 찬다. 유가 손으로 처녀의 엉덩일 쥐어박는다. 처녀도 유의 엉덩일 손으로 쥐어박는다. 유가 아예 몸을 돌려 두 손을 쥐고 처녀의 등허리를 마구 때린다. 처녀도 유의 등허리를 마구 때린다. 그들은 동시에 들고 있던 가방을 신호등 밑에 내려놓고 서로의 등을 때리고 발등을 건드리고 엉덩이를 발로 걷어찬다. 억압이 없는 장난기. 그러는 사이 신호등이 바뀐다. 그들은 서로의 가방을 얼른 집어들고 손을 잡고 신호등을 건넌다. 길을 건넌 뒤 너와 내가 터뜨리던 웃음.

자매나 형제, 혹은 그와 맞먹는 친구나 연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런 스킨십의 순간들은 장난스럽고 억압이 없어 유쾌하며 종내엔 아름답다. 현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고독과 단절, 불안과 메마름, 권태의 순간들을 깨뜨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친밀감의 박동들이다. 나는 내 소설 속에 그 박동들이 생수 같은 문장이 되어 졸졸졸 따라붙어 줬으면 싶다./소설가 작품집 ‘딸기밭’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장편 ‘깊은 슬픔’ ‘외딴 방’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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