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욕이 영화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 스토리는 좀 더 감각적으로, 카메라는 좀 더 세련되게, 연기는 격정적으로. 박신양, 최진실 주연의 「편지」는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사실 영화적으로는 그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감정의 과잉, 인위적 상황은 「눈물」을 얻어 내려는 감독의 의욕이 지나쳐 보였다.이정국 감독의 세번째 영화 「산책」은 자극에 물든 관객들의 눈을 끌 방법으로 욕심을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조미료에 맛들인 혀끝에 가장 강력한 충격은 아예 그것을 통째로 빼버리는 것이다.
거리 길 모퉁이의 레코드점 주인 영훈(김상중)은 언제나 예전의 짝사랑이 좋아하던 모차르트의 음악을 틀어 놓는다. 아직 기다림을 버리지 못한 짝사랑, 온전한 가수의 길을 버리지 못하고 일년에 한번씩 콘서트를 열어 가수의 꿈을 유예한다.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와 단숨에 영훈의 일상에 파고 든 여자 연화(박진희). 가슴을 강조한 빨강색의 옷을 즐겨 입는 연화는 틈만 나면 댄스곡을 틀어대며 영훈과 그녀의 심리적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를 가늠케한다.
어울리지 않는 두 남녀가 어떻게 결합하게 되는지는 멜로의 주요 단서중의 하나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내면의 공감 대신 일상을 보여준다. 접대부 출신의 연화는 사별한 아내의 추억을 더듬으며 말을 끊어버린 영훈의 아버지(박근형)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되면서 그의 생활 속으로 파고든다. 「나를 사랑하느냐」「나는 당신의 과거까지 사랑한다」 이런 류의 대화는 한 번도 없다. 룸살롱으로 돌아간 연화는 영훈이 부르던 「나뭇잎 사이로」를 취객들 앞에서 부르고 다시 레코드점에서 되돌아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러나 역시 「멜로」 드라마는 설탕맛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단선적 스토리는 다소 지루하고 동화 속 주인공처럼 모두 착하고 선한, 그래서 갈등이 없는 인물들은 예쁜 박제같은 느낌이다. 조동진이 맡은 영화음악은 포크의 추억으로 이끈다. 마음먹기에 따라 감동과 지루함이 엇갈리는 영화. 4일 개봉. 오락성 ★★★ 작품성 ★★★☆
박은주기자
jupe@hk.co.kr
■영화 '산책'의 주인공 박진희
성취욕 강한 아내와 이혼한 대학 시간강사, 여자 얼굴만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마음만은 착한」 친구 동료와 결혼한 여고 교사. 영화 「산책」의 주인공은 일상적이다. 유일한 파격은 술집 여자인 연화. 「여고괴담」의 모범생, 「간첩 리철진」의 미대생. 박진희(22)의 이미지는 도시적이다. 세련되고 발랄한 도시 신세대 같다. 영화 속 이미지로는 가장 큰 변신이기도 하다.
『오히려 천방지축인 연화의 성격에는 빠져 들기가 쉬웠어요. 「여고괴담」의 모범생 역할이 더 어려웠지요. 감독님이나 저나 접대부를 별로 만나본 적이 없어 공부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 내느라 고생은 했어요. 하지만 성격 면에선 잘 맞았던 거 같아요』 빨간 매니큐어와 원색의 옷, 웨이브 강한 퍼머 머리. 도식적인 1980년대 스타일의 「술집 여인」의 캐릭터를 창출해 아쉽기는 하지만.
선이 굵은 캐릭터는 잘 소화하지만 외려 일상적인 배역에는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인 김상중의 연기가 다소 섭섭했다면, 박진희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다. CD를 훔쳐가는 여고생을 잡아 족치는 장면에선 예의 만만찮은 「이력」을 보이다가도 레코드점의 뒷편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인생의 쓴 맛을 아는 여자 같다. 『그런 장면이 잘 맞나 봐요. 「여고 괴담」에서도 담배 피우는 장면이 인상적이라던데, 「산책」에서도 여러 사람이 그 부분을 지적하네요』 담배를 즐기는 게 아니라 시간을 태워버리는 듯한 표정, 그 표정을 잡아 내는 박진희는 한결 성숙한 분위기이다.
데뷔해서 한번 뜨면 큰 역이 아니면 안하려고 하는 게 요즘의 배우들. 『두시간 동안 관객을 잡아둘 만큼, 지루하지 않게끔 할 수 있을 때 좀 더 큰 배역을 욕심낼래요. 당분간은 TV로 승부하고 싶구요』 2월 28일부터 KBS2 월화드라마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는 깡패 주진모를 사랑하는, 여유있게 자라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 처녀 역을 맡았다. 적격이다.
『달리(레일 촬영)를 한번도 안 쓰고 고정 카메라에 풀 샷으로 찍은 영화예요. 큰 사건, 볼거리를 찾는다면 다른 영화를 권하고 싶어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나 잔잔하게 생각하고 싶으신 분들이 오셨으면 해요. 그게 감독님의 의도인것 같아요. 제 생각도 그렇구요』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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