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말동(趙末同), 17세 소년으로 직업은 농부, 대정(大正) 8년(1919년) 3월 13일 경북 의성군 비암면 서부동(洞) 입구에서 50여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며 고성을 외치고 다녀 치안을 방해했음.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2월에 처함. 성격은 온순한 편』3·1 독립운동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름 없는 숱한 민초들이었음이 정부자료로 증명됐다. 호미와 쟁기 대신 손에 태극기를 들고 읍내로 달려간 농부, 태극기와 전단 제작을 위해 사재를 턴 상인, 장사는 팽개친 채 길거리를 뛰어다닌 재봉틀 판매직원 등….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뚜렷한 정치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었던 이들이 생업마저 놓은 채 만세시위에 나선 것은 단지 「우리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순박한 염원 하나 때문이었다.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소장 남효채·南孝彩)는 29일 3·1 독립운동과 관련해 대구교도소에 수감됐던 117명의 「재소자 신분장(身分狀)」을 발굴·공개했다. 17권짜리(각권 180∼200여쪽) 이 문서에는 수감자의 신상과 혐의는 물론, 재판 판결문 및 수형기간 중 습관과 생활태도까지 일본어 초서로 꼼꼼히 기록돼 있다.
특히 문서에 기록된 이들은 평범한 삶을 꾸리던 서민들이 대부분이어서, 일부 선각자들에게 국한돼온 독립운동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는 게 학계의 평가. 전국 방방곡곡의 농부, 두부상, 잡화상, 학생, 서당교사, 교회집사, 병원간호원, 심지어 승려들까지 포함돼 있어 당시 광범위하고 뜨거웠던 독립의 열기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 김태웅(金泰雄)연구관은 『서대문 교도소 수감자들의 간단한 신상명세카드가 발견된 적은 있지만, 이처럼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민중과 관련된 문서는 처음 발굴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 기록을 검토, 조만간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추가지정할 예정이다.
한편 이 자료에는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할 목적으로 독립호소 서한을 작성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과 관련, 투옥된 유학자 곽종석(郭鍾錫)선생의 기록도 포함돼 있다. 곽종석선생은 감옥으로 면회 온 조카에게 『만약 오늘 형이 집행된다면 이는 민족에 대한 큰 영광』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정부기록보존소는 『다른 형무소에도 이와 비슷한 자료가 보관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른 시일내 자료들을 수집·복원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주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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