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에는 남한산성 행차 어떨까』 경기 광주군과 성남시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남한산성(국가사적 57호). 성곽의 주변부가 높고 험악한데 비해 성의 중심부는 낮고 평지를 이루는 등 산성으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춰 삼국시대부터 최고의 요새로 평가돼 온 곳이다.남한산성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시조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 말갈족이 침입하자 온조왕이 당시 도읍지였던 하남위례성에서 지형적으로 요새의 요건을 갖춘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남한산성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 시작한다. 이후 신라 문무왕 12년(672년)때 부터 토성으로 성을 쌓는 작업이 시작됐고, 당시 이곳은 주장성 또는 일장성으로 불렀다.
토성에 불과하던 남한산성이 석성(石城)으로 변모, 현재의 모습으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인조 2년(1624년)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이후 숙종때에는 외성을 축조하고 조선말 순조때까지 시설물공사를 계속해 우리나라 산성중 가장 많은 시설을 완비한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때만 해도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방(행궁·行宮)이 73칸이었으며 신하들이 이용하는 하궐(下闕)도 154칸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
1636년 병자호란때 인조임금이 이 곳으로 피신했으나 강화가 함락되고 최명길 등 주학파의 주장에 따라 45일만에 청나라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때 각종 시설이 거의 소실되고 6·25로 대다수가 훼손됐으나 이후 수차례의 증·개축을 통해 현재는 둘레 8㎞, 높이 7.5㎙의 석성성곽과 사적을 복원했으며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성내에는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수어장대, 청량당, 숭열전,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등이 있으며 망월사지, 개원사지, 행궁지 등 기념물도 다수 있다.
한창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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