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생김새와 기능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놓고 있는 지를 대충 알 수 있다. 자동차 디자인의 역사는 실내공간의 주거감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전개되었다. 차체는 계단 1개의 높이까지 낮아졌고 본네트 앞에서 차체 뒤 끝에까지 이르는 곡선은 단절을 느낄 수 없는 「흐름」으로 바뀌었다. 실내 공간은 살림집처럼 좌석과 짐칸이 구획되었고, 양쪽 유리창의 평면 분할도 주거감의 원칙을 알뜰하게 배려한다. 자동차를 통제하는 모든 기능은 운전자 앞 쪽으로 집중되어 왔고, 사이드 미러와 룸미러의 섬세한 발달은 외계의 풍경을 모두 사물화된 기호로 바꾸어 운전자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때, 사람들은 여전히 집안에서처럼 사적인 주거공간 속에 앉아 있고, 운전자에게는 이 사적인 공간이 모든 정보와 기능이 집중되는 세계의 중심이다. 요즘의 모터쇼는 사람의 얼굴모양을 느끼게 하는 다자인들을 많이 보여준다. 멀리서 보기에 쇳덩어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가 달려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자동차일수록 내부의 사적인 주거감은 크고 기능과 정보는 더욱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자동차 디자인의 역사는 사람의 기능과 외양과 느낌을 닮아 가는 역사이고, 동시에 사람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역사이다. 세계를 사물화된 기호의 체계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겠지만, 요즘엔 그런 사람은 없다. 사적인 중심 속에 들어 앉아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길의 공적 개방성에 의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석 앞으로 집중된 기호의 힘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가 십상이다. 길이 막힐 때, 그는 오징어나 뻥튀기를 씹으면서 길을 욕하고 정부를 욕하고 다른 차들을 미워한다. 그에게 길이란 생략되거나 단축되거나 질러가야할 대상인 것이다.
18세기의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조화론적 사유의 바탕 위에서 국토인식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백두대간의 흐름을 국토의 뼈대로 세워놓은 「산경표」의 저자이다. 그의 국토인식 속에서 길과 인간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었다.
길에 대한 신경준의 사유는 「도로고(道路考)」속에 들어 있다. 그는 말한다.「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집안을 편하게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길은 그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신경준에게 길은 삶의 도덕적 가치와 상징들 사이로 뻗어나간 공적 개방성의 통로이다. 이 공적 개방성의 통로 위에서, 길을 가는 일은 달리기가 아니라 「행함」이고, 길의 의로움은 집의 어짊에서 출발해서 집의 어짊으로 돌아온다. 신경준의 지리책을 읽을 때, 집에서 길로 나가는 아침과 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저녘은 본래 이 처럼 신선하고 새로워야 마땅하다.
신경준의 도로인식에는 속도의 개념이 빠져 있다. 그의 길은 가야할 곳을 마침내 가는 그 「감」을 도덕으로 인식하는 길이다.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신경준이 말했던 길의 상징성은 속도의 힘에 의해 모조리 증발해 버리는 것 같지만, 길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오징어를 씹을 때도 길은 여전히 상징의 힘으로 삶을 부추긴다.
아직도 상징의 표정이 발랄하게 살아있는 길 위를 저어 가는 일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행복이다. 경남 거창에서 전북 무주와 충북 영동 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고개는 37번 국도의 신풍령(일명 빼재, 덕유산 방면), 30번 국도의 덕산재(나제통문 방면), 579번 지방도로의 우두령(일명 질마재, 영동방면)들이다. 도마령은 나제통문 쪽에서 영동 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비포장 산간 소로이다. 이 옛 길에는 아직 도로 번호가 없다. 이 고갯길들은 길 다운 강인함과 길다운 느림과 길다운 겸허함의 표정으로 백두대간의 중허리를 남북으로 넘는다. 이 고갯길 사이사이에서 백두대간은 대덕산(1,290㎙), 민주지산(1,241㎙), 석기봉(1,200㎙) 삼도봉(1,200㎙), 각호산(1,178㎙)들과 거기서 흘러내린 수많은 봉우리들의 첩첩연봉을 이룬다. 능선들은 겹겹으로 포개지면서 목측(目測)의 저편으로 소진하는데, 봉우리들의 북쪽 사면은 아직 흰눈에 덮여 있고, 남쪽 사면은 이미 눈이 녹아서 백두대간의 능선들은 흑과 백의 경계를 따라가며 출렁거린다. 봄이 오는 산맥 속에서 그 경계는 날마다 조금씩 북쪽으로 밀려가고, 저녁마다 석양에 빗긴 일몰의 설산들은 보랏빛으로 타오른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들은 산의 가파른 위엄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길들은 산허리의 가장 유순한 자리들을 골라서 이리저리 굽이치는데, 이 길들은 어떠한 산봉우리도 마주 넘지 않고 어떠한 산꼭대기에도 오르지 않으면서도 고갯마루에 이르러 마침내 모든 산봉우리들을 눈 아래 둔다. 변산반도의 바닷가를 돌아가는 30번 국도나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19번 국도의 표정은 밝고 화사하다. 풍수(風水)에서, 길의 상징과 물의 상징은 같다. 그것은 모두 공적 소통의 조건들이다. 그래서 길의 표정은 그 길이 거느린 물의 표정을 닮는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골과 골을 휘돌아 흐르는 계곡물의 표정을 닮고, 큰 강의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점점 넓어지는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완만함이 있다.
자전거는 덕산재 마루턱에서 출발했다. 여기서부터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까지는 25㎞의 내리막 포장길이다. 용화리에서부터 비포장 산간소로를 따라서 도마령 옛고개를 넘어서 물한리까지 갔다. 산길은 눈에 덮여 있었으나, 갓 내린 눈에 물기가 없어서 자전거는 스파이크 타이어를 쓰지 않고도 산길을 넘을 수 있었다.
산간마을들은 눈 속에서 고요히 엎드려 있었고, 산길에는 이따금씩 멧돼지를 좇는 사냥꾼들만 지나다녔다. 도마령 옛 길은 산의 기세가 숨을 죽이는 자리들만을 신통히도 골라내어 굽이굽이 산을 넘어갔다. 그 길은 느리고도 질겼다. 길은 산을 피하면서 산으로 달려들었고, 산을 피하면서 산으로 들러붙었다. 그리고 그 길은 산 속에 점점이 박힌 산간마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겨서 가는 어진 길이었다. 그 길은 멀리 굽이치며 돌아갔으나 어떤 마을도 건너뛰거나 질러가지 않았다. 자동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길은 본래 저러한 표정으로 굽이치고 있을 것이었다. 어두워지는 산은 무서웠다. 도마령 내리막길에서 사람 사는 마을을 향해 속도를 냈다. 저녁 무렵에 물한리에 도착했다. 민박집 주인은 자전거가 눈 덮인 도마령을 넘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너무 지쳐서, 덕산재 휴게소에 세워놓고 온 자동차가 그리웠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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