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가을 뉴욕의 아메리칸자연사박물관에 3개월 정도 머문 적이 있다. 우리나라와 관련한 새의 표본을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만해도 외국에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때라 내가 갖고있는 표본도 가져가 자세히 알아볼 참이었다.자연사박물관 지하에는 100만점이나 되는 조류 표본이 보관돼 있었다. 미국인들이 191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것도 있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유라시아 북반부 조류분야의 권위자 찰스 보우리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표본 하나를 보여주며 『이게 어떤 놈이냐』고 감별을 부탁했다. 소장은 했지만 정확한 정체를 몰랐던 표본이었다. 세계적 권위자인만큼 자세한 대답을 해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는 내가 떠나올때쯤 돼서야 이렇게 말했다. 『글쎄, 혹시 신종이 아닐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저 분이 정말로 1,500여 쪽에 달하는 거작을 쓴, 그 유명한 조류학자란 말인가』하며 실망을 하게됐다.
귀로에 일본 도쿄(東京)의 야마시나(山階) 조류연구소를 들렀다. 연구소는 원래 우리나라와 중국 등 동북아 조류 20여만점의 표본을 갖고 있었지만 2차세계대전때 폭격을 맞아 10만점으로 줄어있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그 정도의 표본을 갖춘 곳은 야마시나 연구소가 유일했다.
나는 내가 지닌 표본과 그곳에 보관중인 표본을 양손에 쥐고 일일이 맞춰보았다. 그 결과 놈이 노랑눈썹솔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세계적 석학에게서 실망은 했지만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자연이든 역사든 문학이든 정치든 결국 그 나라 것은 그 나라 사람이 가장 잘 알고, 또 잘 알아야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자면 자기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점도 함께 깨달았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
부지런히 산과 강을 누비며 우리나라의 새를 관찰해야하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는다. 새의 식별이 야외 생활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오히려 실내에서 하는 학문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이다. 해당 분류군 각각의 이름을 모르면 계통적 개념이나 역사를 체계적으로 알지 못하는데도 그러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원병오·경희대 명예교수 한국조수보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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