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길 인생의 길'학문의 길 인생의 길
역사문제소 엮음
역사비평사 발행, 1만5,000원
요즘 생존과 번영의 희망은 연예인과 벤처기업가 뿐이라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학문의 묵묵함으로, 시대정신의 치열함으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다. 모순의 현대를 살아 온 금석학의 대가 임창순, 한국 여성학·여성운동의 선구자 이효재, 분단극복을 위한 역사학자 강만길… 한번쯤 이들의 삶의 지향점과 학문의 세계를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모순과 허위의 시대일수록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했던 인간의 징표를 보고 싶기에.
일본식민지, 6·25전쟁, 4·19의거, 5·16쿠데타, 10월유신,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단순한 지식인이기를 거부하며 실천하는 지성으로 살아 온 12명의 학자들. 한국사 분야의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 임창순 전 청명문화재단이사장, 강만길 전 고려대교수, 조동걸 전 국민대교수와 서양사의 민석홍 전 서울대교수, 차하순 전 서강대교수, 경제사 전공인 최호진 전 연세대교수, 주종환 전 동국대교수, 언론학의 송건호 전 한겨레신문회장, 리영희 전 한양대교수, 이상희 서울대 명예교수, 그리고 사회학 이효재 전 이화여대교수.
지난해 타계한 임창순을 제외한 이들은 살아 있는 역사 인물이다. 이들의 역할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이들의 경험담과 현실관은 신념없이 이리 저리 흔들리고 지조없이 우왕좌왕 몰리는 현대 사회에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사회의 모순과 권력의 부패가 횡행할 때 지식인은 세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모순과 부패에 편승 출세하는 사람들과 모순에 침묵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철저히 모순과 부패에 저항한 지성인들. 12명의 학자들은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지성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식민사관에 도전해 민족사학 정립에 노력한 이우성, 한국경제학을 정립한 최호진, 한국의 서양사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차하순 등 전공과 학문 방법론은 다르지만 12명의 학자를 아우르는 잣대가 있다. 학문의 보편성과 진정성에 가치를 두고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성사(知性史)를 표방한 책들 중 빠지기 쉬운 오류가 인간의 생생한 모습보다 신화 만들기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오류를 본인들의 진솔한 심경으로 극복하고 있다. 『대학교수를 불러다 족치고 조사하고 사표받고…』 (민석홍) 『두번이나 울었어요. 기자들 앞에서 울고…』 (송건호) 『학자 집안이라고 하지만 집사람은 나 혼자 벌어서는 먹고 살기 힘드니까 함께 벌자고 해서…』 (이상희)처럼 12명 학자들의 가려진 인간적인 고뇌는 일반인들에게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를 준다.
이 책은 조광 고려대교수 등 후학들이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한 계간지 「역사비평」의 「나의 학문 나의 인생」을 엮은 것이다. 인터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담자들이 12명 학자들의 학문의 세계를 정리했으나 이들의 학문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
이책에 소개된 민석홍의 말처럼 『역사란 인간의 드라마』다. 학문과 현실이란 무대에서 12명이 펼친 12편의 진지한 드라마를 보는 것은 어떨까.
배국남기자
kn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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