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의 강제철거는 살인행위입니다』5일 설을 맞은 서울 관악구 봉천3동 주택재개발지구. 200여세대 주민들 가운데 고향에 내려간 사람이 한명도 없다. 『곧 강제철거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 탓이다. 이들은 철거민대책위 사무실 등에서 삼삼오오 떡국을 끓여 먹는 것으로 설맞이를 대신 했다.
『여기서 쫓겨나면 거리로 나앉을 수밖에 없어요』 사글세 보증금 200만원이 전재산인 김모(43)씨에게 강제철거는 곧 노숙자가 되라는 말과 다름없다.
지난달 29일과 설 나흘 전인 1일에는 철거용역회사 직원 수십명이 들이닥쳐 포클레인으로 주인이 떠나 비어있는 공가(空家)를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멀쩡히 사람이 사는 집이 파손되기도 하고 물리적 충돌도 빚어졌다.
주민 이영숙(李英淑·36)씨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대낮에 집이 헐릴까 불안해 일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며 『떡국도 간신히 마련할 만큼 생계가 어려운 데 구멍뚫린 벽 때문에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라는 말이냐』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웃주민 최성기(崔成基·47)씨는 『이곳을 떠났던 사람들도 대부분 다시 재개발지역으로 갔다』며 『이주대책이 없는 재개발정책이 계속되는 한 악순환은 되풀이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관계자는 『지난해 수원 철거민 사제 화포사건처럼 강제철거는 생존권을 위협하는 절박한 인권 문제』라며 『재개발법상 동절기에는 철거가 금지돼 있지만 지난달 서울 상암지구에서처럼 겨울철에도 강제철거가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택지개발법에는 동절기 철거금지나 가수용단지 건립 등 보호대책이 마련돼 있지 않아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5일 오후 경기 의왕시청 앞에서는 내선동 갈뫼지구 철거민 7가구 20여명이 4평 남짓한 비좁은 비닐천막에서 설을 맞았다. 쫓겨나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이 길바닥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다. 시에서 1,000만원 가량의 전세자금을 준다지만 이 돈으로 집을 얻을 곳은 또다른 철거예정지역 뿐이다.
철거대책위원장 손모(33)씨는 『누구를 위한 개발,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 묻고 싶다』고 분개했다. 여기서 밀려나면 주소가 없어 전기, 전화, 수도가 공급되지 않고 화재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무적(無籍) 비닐하우스촌밖에 갈 곳이 없다는 게 이들의 절박한 심정이다.
주거연합 노기덕(盧起德) 사무국장은 『저소득 원주민 대부분이 사업이 끝나기 전 입주권을 팔아 재개발사업에서 원주민의 재입주 비율은 20% 내외에 그친다』며 『나머지 원주민들은 다른 재개발예정지역으로 흩어지거나 비닐하우스촌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주거연합이 파악한 무적 비닐하우스 거주자는 서울에만 14개마을 3,293세대 1만2,750명에 이른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황종덕기자 lastrada@hk.co.kr
■ 재개발사업 해결책
사업주측의 강제철거와 이에 맞서는 철거민의 대립은 낯선 광경이 아니다. 재개발사업 현장에선 70년대 개발독재시절과 똑같은 모습이 21세기에 들어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강제철거와 생존권투쟁」의 악순환은 재개발규정의 허점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서울시 스스로 1998년 「주택재개발기본계획」에서 재개발 사업이 저소득 주민의 주거환경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자인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일정비율 이상의 영구임대주택과 가수용시설 건설의 강제화만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주거연합 노기덕 사무국장은 『일반분양 면적을 늘리기 위해 조합이나 자치단체가 원주민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건립을 회피하고 있다』며 『가수용단지 건설마저 지지부진해 결국 철거대상 세대들이 견디지 못하고 입주권을 팔아 넘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서울 상암2지구에서도 강제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한창인 가운데 입주권이 4,000만원 내외에서 거래되고 있다.
노씨는 『저렴한 영구임대주택 건설과 충분한 가수용시설 공급이 약속되면 재개발 사업에 반대할 주민들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석원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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