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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어둠속에서 소리빛 찾은 장한 내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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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족이야기] 어둠속에서 소리빛 찾은 장한 내아들

입력
2000.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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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긴 터널을 오랫동안 지나온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밝은 빛은 보이지 않는다.장애 자식을 둔 부모치고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나에게 지난 28년의 세월은 그랬다. 앞 못보는 내아들 율궁이(28). 가난한 유복자로 태어나 첫 돌도 되기 전에 시력을 잃은 아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세상으로 쫓겨난 아이였다.

율궁이를 가졌을 때 남편은 고혈압으로 덧없이 세상을 떠났다. 온통 절망이었지만 뱃 속에는 꿈틀거리는 희망이 있었다. 1972년 4월, 아들이 태어난 후 나는 언제나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품에서 잠시라도 떠나면 고운 나의 아들에게 흠집이 날 것 같아서였다. 짧지만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어느 날 율궁이를 목욕시키는데 심하게 울어댔다. 그러더니 눈동자가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는 이웃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는 아이가 놀래서 그럴 경우가 있으니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러나 아기의 눈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안과에 갔다. 병명은 시신경마비. 치료 불가능이라는 진단이었다. 나의 눈 앞도 캄캄해졌다. 그가 태어난 지 3개월만의 일이었다.

아이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미아리고개의 단칸방에 아이를 남겨두고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돌아와보면 앞 못보는 아이는 이 곳 저 곳에 부딛히고 깨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돈이 모이면 병원으로 달려갔다. 일본에서는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에도 두 차례 다녀왔다. 그러나 율궁이의 눈은 열리지 않았다. 절망의 그늘은 점점 짙어졌다.

『차라리 나랑 같이 죽자! 이렇게 벌레처럼 살아서 뭘 하니!』 아이를 껴앉고 함께 울부짖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율궁이가 특이한 행동을 보인 것은 그 즈음이었다. 마당의 수돗물을 하루종일 틀어놓아 주인 아주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통에 물을 담아주면 사이다병에 담아 다른 통으로 옮기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하루종일 놀았다. 국립맹아학교에 입학해서는 친구들의 신발을 몽땅 기숙사 담 너머로 던져버린 적도 있다. 이유를 물어보니 『신발 떨어지는 소리가 참 좋다』는 것이었다.

9살이던 어느 날 새벽, 신문배달 소년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를 듣더니 『엄마 이중창이 들려와』라고 말했다. 『이중창을 계명으로 불러봐』 했더니, 『미미 레레 파파…』하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제서야 아이의 재능에 눈을 떴다. 숨은 재능을 몰랐던 지난 날을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한푼 두푼 모은 돈을 모두 털어 피아노를 샀다. 점자악보가 있지만 구할 길이 막막했다.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이 셀로판지악보였다. 셀로판지에 날카로운 것으로 그리면 볼록 튀어나오는 것을 이용해 음을 표시했다. 악보는 성공적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자를 대고 셀로판지에 율궁이가 읽을 악보를 그렸고 율궁이는 세상에서 듣는 모든 소리를 악보로 옮기며 작곡을 했다.

율궁의 재능은 놀라운 것이었다. 1983년 8월 일본에서 열린 도쿄(東京)국제작곡경연대회에서 「나는 바람을 잡아타고서」로 우수상을 차지했다. 참가자 대부분이 정상인이면서 대학생인 경연대회였다. 이듬해에는 일본서 열린 세계어린이음악제에서 「민선의 소리」로 최우수상격인 「월광상」을 받았다. 이후 1987년까지 율궁은 참가하는 국제 작곡경연마다 크고 작은 상을 휩쓸었다. 신동(神童)이라는 매스컴의 찬사가 쏟아졌다.

1988년부터 1997년까지 네 번의 작품발표회를 열었다. 세종문화회관과 호암아트홀등을 오가며 러시아의 성악가 넬리 리, 소프라노 강화자선생님, 테너 임웅균 선생님 등이 아들의 발표회에 기꺼이 참가해주셨다. 아직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율궁이는 지금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다. 뛰어난 목소리를 가진 성악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 소리에 맞는 곡을 만드는 것이다. 7개국 정도를 돌고 와 성대한 작품 발표회를 가질 계획이다. 이르면 당장이라도 출발하겠지만, 늦으면 몇년이 걸릴지 모른다.

율궁이는 이를 위해서 아침마다 집을 나선다. 지하철에서 자신이 작곡가임을 알리며 승객들로부터 직접 후원금을 받는다. 벌써 10년째 100원 혹은 500원씩 건네주는 격려의 동전소리를 들으며 꿈을 키우고 있다. 처음 지하철로 향하는 아들의 모습은 내 가슴을 찢어놓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아니다.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죄짓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지 해야한다는 마음가짐. 율궁이의 모습이 대견스럽고 흐뭇할 뿐이다.

터널의 끝은 아직 멀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희망이 있다.

송혜미자(宋惠美子)씨는 누구

1944년 일본 홋카이도(北海島)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후 귀국해 경북의 예천여고를 졸업했다. 1972년 아들 율궁이 태어나기 전 남편과 사별했으며 생후 3개월만에 시력을 잃은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혼신을 다해 유명 작곡가로 키웠다. 지금도 행상을 해가며 아들을 뒷바라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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