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대본만 보자. 일상적 대사에서도 상징과 운율의 내재적 긴장을 포기하지 않았던 오태석 극작·연출의 원칙에 비쳤을 때, 이 연극은 느슨한 감마저 든다. 함경도말 경상도말 충청도말 등 각처의 방언이 걸쭉하다.극단 목화의 「여우와 사랑을」은 존재의 집으로서 언어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다. 세계화와 기호화의 물결 속에서 고유어는 갈수록 골방 신세인 지금, 그의 신작에는 구어체 우리말에 대한 애정과 확신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그러나 대본만 믿고 있다가는 보기좋게 허를 찔리고 만다. 시공을 초월하는 오태석씨의 연출법은 독립군가에서 힙합까지 능청스레 버무려 내는 까닭이다. 그처럼 플레이백 반주에 노래를 부를 경우, 십중팔구는 무선 마이크를 쓰기 일쑤인 요즘 풍토를 극단 목화 식구들은 완전 육성으로 맞선다.
어쿠스틱으로 들리는 남정네의 소리는 극장 천정을 찌렁찌렁 울리고, 여인네의 그것에는 잊어 버렸던 정이 듬뿍 배어 있다. 박희순(옌볜 교포 대표), 황정민(옌볜 처자) 등 모두 19명의 젊은 배우가 일궈내는 몸짓과 소리는 무명 심지에 들기름 차곡차곡 배어 들듯, 오늘도 극단 목화의 전용 소극장 아룽구지를 숙성시켜 나간다. 발가벗은 목소리에 대한 믿음이 거기 있다.
극의 무대는 불법 체류 옌볜 교포들이 경영하는 밥집. 여권상 체류 기간을 넘겼지만, 그냥 갈 수 없다. 윤동주 사상 실천 선양회원이기도 한 이들은 윤동주기념 도서관 건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 가야 하는 것이다.
장기를 팔아서라도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그곳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이 귀소본능의 연극에 IMF는 족적을 남기고 말았다. IMF 이전판에서는 옌볜 교포가 귀향하는 것으로 결말지워졌으나, IMF가 휩쓸고 간 지금은 그래도 여기가 조국이니 남아서 살아보는 것으로 결론지워진다. 그렇게 해서라도 스스로 힘을 북돋우자는 뜻이다. 그것은 동시대를 또 다른 식민지로 보는 오씨의 현실 인식이기도 하다.
94년 예술의 전당이 벌였던 「오태석 연극제」의 뒤를 이어 극단이 자체로 벌이고 있는 「오태석 연극제2」의 마지막 작품. 지난해 5월 시작, 「춘풍의 처」 「부자유친」 「코소보 그리고 유랑」 등으로 이어진 무대에는 지금 젊은 관객의 지지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그는 극장 부근 옌볜 교포 아주머니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젊은 단원들과 함께 늦은 밤참을 하기 일쑤다. 『남북 분단 이전의 원형적 모습이 얼마나 좋아요?』 그가 거기서 매일 확인하는 곰살궂은 북한 사투리와 순박한 성정은 이 작품에 고스란히 삼투돼 있다. 2월 20일까지 아룽구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