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4박5일동안의 겨울 계절학기를 끝마쳤습니다. 우리 공동체 학교 아이들, 지역 아이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외지에서 온 중·고등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아이들 스스로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고 새끼꼬기, 묵은 밭에서 칡넝쿨 걷기, 소나무 가지를 치고 솔잎을 따 효소 만들기, 낫 갈기를 익혀 팽이 깎기, 개펄에 나가 바지락 캐기, 새벽에 일어나 산에 오르기, 달집 만들고 쥐불놀이하기,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과 국 끓여먹기 같은 것을 골고루 체험하게 했습니다.요즈음에는 시골 아이들도 낫을 어떻게 가는지, 새끼를 어떻게 꼬는지 잘 모릅니다. 가마솥에 밥을 하고 뜸들이는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산 살림, 들 살림, 갯 살림은 우리네 기초 살림이고 도시에 살건, 시골에 살건 유사시에 대비해서 자연에서 얻는 재료를 가공해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필요한데 우리 제도교육기관에서 이 살림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으니 참 답답합니다.
때가 어느 땐데 그런 케케묵은 생활양식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드느냐고 코방귀를 뀔 분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자연에서 배우는 게 없는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제대로 철이 들지 않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철없는 사람은 제 앞가림을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에 기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즈음 들어 생태계를 위험에 빠뜨려 결국 자기가 빠져 죽을 구덩이를 파는 자연파괴가 범세계적으로 자행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자연과 상생하는 길을 찾는 대신에 기생과 약탈을 일삼은 철없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을 무턱대고 숭상합니다. 그러나 같은 대장간에서 벼리는 연장이라도 그것이 낫이나 호미인지, 창이나 화살촉인지에 따라 문명의 이기가 되기도 하고 재난의 구원이 되기도 합니다. 낫이나 호미는 자연과 관계맺음 속에서 자연스러운 생명의 시간, 다시 말해서 철에 따라, 철에 맞추어 제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창이나 화살촉은 자연과 동떨어진 인공의 시간 속에서 이유야 어찌되었건 철없이 만들어지고 철 모르는 상태에서 쓰이기 십상입니다.
과학기술이 자연과 상생하는 생명의 시간 속에서 움트고 열매 맺으면 문명의 이기가 되지만 자연과 동떨어진 인간의 시간 속에서만 만들어지고 그 쓰임새가 결정되면 제 길을 벗어나 인류에게나 다른 생명체에게 큰 재난으로 작용하기 쉽다는 것을 인공의 에덴동산을 꿈꾸는 도시사람들은 곧잘 간과해버리고 맙니다.
사람에게 철을 가르치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아무리 슬기로운 사람도 제 힘으로 자식들을 철들게 만들 수 없습니다. 자연이 가장 큰 스승이라는 말은 자연만이 바뀌는 생명의 시간 속에서 사람을 철들게 만들고 철나게 만들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사람은 한철, 또 한철 자연과 교섭하는 가운데 밖에서 나는 봄철 여름철 가을철 겨울철을 내면화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철이 나고 철이 듭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도 시골에 터 잡은게 이제야 겨우 여섯해째 접어드니까 다섯살배기 철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육의 큰 목표 중 하나가 아이들을 철들게 하는 것이라면 아이들이 생명의 시간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교육개혁은 인공의 시간계획표 속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윤구병·철학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