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조직에서의 의사결정 방식은 서구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조직 내에서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누가 직접 주도적으로 수행하느냐는 데서 나타난다. 서구에서는 높은 지위의 직무일수록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직접 수행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중요한 일이든 쉬운 일이든 부하직원이 상관의 입장에서 결론을 내린 「품의서」를 작성해서 상관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것을 품의제도(稟議制度)라고 한다.이것은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엄격한 가부장적 관습이 의사결정 방식으로 정착하게 된 제도이다. 일본이 식민지를 통치하면서 그대로 한반도에 이식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사결정 방식이 일제의 잔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품의제도에도 장점이 있을 수 있다. 의사결정을 내릴 때 아랫사람의 의견이 위로 올라가면서 수렴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은 농경사회 또는 산업사회의 경영구조 속에서나 나타나는 것이지 정보화된 조직 속에서는 오히려 역기능적인 면이 더 많다. 의사결정의 신속성을 저해하고 상하간의 책임 귀속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부하직원이 만든 품의서를 보고 마음에 들면 결재해 주고 그렇지 않으면 퇴짜를 놓는다. 부하직원은 윗사람의 의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서 결재를 받지 못하는 횟수가 누적되면 인사고과에서 치명적인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품의에 의한 의사결정 방식에서는 직무의 본질적인 개념, 즉 그 직무담당자가 창출해야 할 성과(成果)보다는 윗사람을 잘 모시는 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다. 심지어 공무원들이 장관의 교체가 발표되는 바로 그 시각에 새로운 장관의 취임사와 명함을 들고 찾아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직무성과와 상관없는 충성 경쟁 때문에, 공무원들은 윗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정보는 가급적 부드럽게 만들거나 좋아할 만한 정보만 보고하게 된다. 위로 올라갈수록 현실파악에서 점차 멀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품의제도의 또 다른 문제는 누구에게 책임을 귀속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매우 애매하게 된다는 점이다. 부하직원이 결론을 내리고 상관은 부하직원의 견해를 승인하는 형식으로 도장만 찍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안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부하직원은 상관의 책임이라고 우길 것이고, 도장 찍어준 상관은 부하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외환위기 때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책임 없다고 발뺌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매커니즘 때문이다.
이처럼 상사와 부하 사이에서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분명하게 그을 수가 없다 보니 부하는 책임질만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매사를 상관에게 떠넘긴다. 그래서 공무원의 복지부동이 생겨나고 결재단계가 길어지는 것이다. 이런 꼴을 보고 서양의 행정학자들은 품의제도를 「위로 떠넘기기 제도(Upward Referral System)」라고 비꼬고 있다. 그들은 부하의 창의력을 억제하면서 상관을 점차 권위주의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비능률적인 제도라고 매섭게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똑똑한 공무원들도 품의제도 속에 매몰되면 멍청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행 직무평가팀장 최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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