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불패신화를 이어온 세계바둑 1인자 이창호9단이 새 천년 벽두부터 연패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그의 철옹성에 심상치 않은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승부의 세계에서 어차피 패배란 불가피한 것이지만 이번엔 사정이 좀 다르다. 바둑계 안팎에서 『슈퍼 컴퓨터(이창호)에 Y2K가 발생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만큼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단명국(短命局) 퍼레이드가 이어지고 있다.지난 해 6월 제1회 중국 춘란배 결승전에서 스승 조훈현9단에게 우승을 뺏긴 뒤 국내기전에서 유창혁9단과 최명훈7단 등에게 잇따라 패배, 한동안 슬럼프에 시달렸던 이9단. 이번에도 서막은 춘란배였다. 이9단은 지난 해 12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2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16강전에서 마샤오춘(馬曉春)9단에게 시종 열세 끝에 171만에 맥없이 손을 들었다. 마9단은 최근 2년간 국제무대에서 10번 만나 단 한번도 진 적이 없는 상대적 「약체」. 더구나 끝내기 단계에서 간발의 차이로 승부를 뒤집곤 하는 「수비바둑의 귀재」 이9단이 기 한 번 펴보지 못한 채 단명국으로 졌다는 점이 의외였다.
춘란배의 악연은 「루이 쇼크」로 이어졌다. 뉴밀레니엄 첫 대국에다 남녀 성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제43기 국수전 도전자 결정전에서 백을 쥔 이9단은 「반상의 마녀」 루이나이웨이(芮乃偉)9단에게 중반 무렵 어이없이 대마를 잡히면서 147수만에 돌을 던지고 말았다. 한국 바둑사상 최초로 외국인에게 국내 타이틀 도전권 티켓을 안겨준 치욕스런 패배였다.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이어 10일 열린 제11기 기성전 도전3번기 제1국에서 이9단은 도전자 최규병9단에게 100수에도 못미치는 초단명국(93수) 끝에 불계패를 당했다. 특히 이 패배는 「신산(神算)」으로 불릴만큼 수읽기와 계산에 능한 이9단이 아주 초보적인 사활문제를 착각하는 바람에 당한 것이라 기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날 대국에서 백을 쥔 이9단은 초반 최9단의 세력작전을 분쇄, 좌하귀에서 적의 대마를 수중에 넣으며 안정적 승리가 예상됐으나 우하귀에서 어처구니 없는 수읽기 실수로 백대마를 「귀곡사」로 헌상, 만방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9단을 상대로 역대전적 16전 16패를 당해온 최9단은 이로써 한 판만 더 이기면 생애 첫 타이틀을 따게 된다.
바둑계는 이9단의 잇따른 패배에 대해 섣부른 진단이나 우려는 유보한다. 오히려 『과거에도 그랬듯이 정신적인 측면이나 기력 면에서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초반에 상대가 싸우자고 달려들면 슬쩍 비껴 섰다가 나중에 옆차기를 날리던 이9단이었는데 요즘엔 어떤 싸움도 피하지 않고 곧바로 맞받아치는 적극적 기풍으로 바뀌고 있다』며 『새로운 바둑 스타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시행착오를 빚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어찌됐든 바둑계의 이목은 26일로 예정된 기성전 도전기 제2국에 집중돼 있다. 큰 싸움에선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는 이9단이 2국 역시 패해 타이틀을 빼앗길 경우 「시행착오」는 철옹성의 몰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