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연행도기행] (2) 조선사절의 뱃길을 따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연행도기행] (2) 조선사절의 뱃길을 따라

입력
2000.01.17 00:00
0 0

[연행도기행] 조선사절의 뱃길을 따라마침내 대항해는 시작되었다. 일찍이 바닷길의 외교 항로는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선(通信使船)이 있었지만 그 소임이나 항속 거리, 선단 규모 등은 중국항로를 따를 수가 없었다. 새로운 해로 시대를 맞아 새로운 항해조례(航海條例)가 이뤄진다. 우선 출항지가 선사포(宣沙浦·현재 평북 곽산군)로 굳혀진다. 1621년 첫 항해의 권진기, 최응허 사행(使行)은 평안도 안주에서 출발, 청천강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대형선박의 내하항행(內河航行)은 조선(操船)이 불편하고 위험이 많아 해항(海港)인 선사포로 바뀐 것이다.

한편 밀수를 단속하는 오늘날의 세관처럼, 중앙에서 파견된 「수검어사(搜檢御史)」 또는 평안감영의 「도사(都事·종5품 벼슬)」가 출입국에 짐 검사를 하며 주로 인삼과 은(銀)을 단속했다. 장삿꾼들이 밀수를 하기 위해 사공으로 위장 취업하므로 당국은 이를 막느라 혈안이었다. 선단은 사절단이 삼사(三使·정사, 부사, 서장관)의 경우 6척, 약식인 양사(兩使·정사, 서장관)일 때는 4척이었다.

「연행도폭(燕行圖幅)」의 가도(가島·평안도 철산부) 정박, 랴오둥(遼東) 반도 연안 항행, 버하이(渤海) 해협 횡단의 장면을 보면 선단은 모두 6척이다. 정확한 묘사이다. 이덕형(李德泂) 사행의 상세한 구성은 홍익한(洪翼漢) 일기에 언급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전 해인 1623년 이경전 사행(삼사로 구성)의 서장관 이민성의 기록이 남아있어 좋은 보기가 된다.

이때 사절단은 모두 348명. 그중 무장 군인이 35명, 전체 인원의 10%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장력을 갖춘 것이다. 배는 6척, 1척당 평균 58명이 탑승했다. 배의 크기는 매우 큰 배, 큰 배, 조금 큰 배, 작은 배의 4등급이며 가장 많이 탄 배는 75명, 가장 적게 탄 배는 49명이다. 2호선, 5호선이 가장 큰 배인데 2호선은 무려 75명이 탑승했지만 5호선은 수용 능력에 훨씬 못미치는 54명만 탑승했다. 아마도 사람 대신 짐을 많이 실은 것으로 보인다. 선단은 사람 이외에도 많은 화물(일용품, 선물, 교역품)을 적재했다. 조선 배는 판옥선(板屋船)의 명성 그대로 선체 규모가 크고 견고했다. 이민성이 스청다오(石城島)에서 좌초, 침수했을 때 응급조치로 침몰을 면한 것은 배가 전라수영(水營)의 우자선(羽字船)으로 매우 튼튼했기 때문이라 했다.

한·중 외교사절은 법정 통로를 반드시 통행해야 한다. 1621년 5월 조선의 권진기, 최응허 사행은 긴급 피난의 상황으로 육로 대신 해로로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이때 조선 국왕(광해군)은 새로운 「해상통로(항로→덩저우, 육로→베이징)」의 승인을 제청해 같은 해 8월 25일자 칙허(勅許)로 승인받은 것이다.

선사포를 출항한 선단은 같은 날 한밤중 가도에 입항한다. 가도에 기지를 둔 명(明)의 총병관(總兵官) 모문룡(毛文龍)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이덕형 사행은 모문룡에게 정치적 협력을 다짐하고 그의 통제 하에 있는 랴오둥 도서지방의 안전항해를 위해 패문(牌文·통행증)과 향도관(嚮導官)의 지원을 받았다. 조선사절의 정식 통행증은 「부험(符驗)」이라고 하여 명 태조 황제가 7통을 조선 국왕에게 보낸 것이다. 「부험」은 사절단의 으뜸인 정사가 소지하여 사절단의 신분과 입국, 통행 등을 보장받는다.

이덕형 사행은 가도를 떠나 북상해서 압록강 하구의 신도섬 앞바다에서 서쪽으로 돌아 최초의 중국 도서인 루다오(鹿島), 다음 스청다오, 광루다오(廣鹿島)를 차례로 지났다. 섬마다 초연(硝煙) 속에 군인과 뭍에서 도망나온 명의 난민으로 들끓었다. 홍익한은 싸움터가 된 이들 도서지방의 어수선한 풍경과 난민들의 참상을 적은 말수로 딱 부러지게 적고 있다.

둥강(東港) 항구에서 배를 내려 서쪽으로 63㎞, 구산(孤山)이라는 읍내가 있고 구산항에서 작은 똑딱선을 타고 남쪽으로 1시간 남짓 가노라면 다루다오(大鹿島)이다. 섬의 크기는 6.6㎦, 작은 섬이지만 어업이 성하고 근래에 휴양지로 개발되어 연간 10여만 명이 찾아오는 이곳은 제법 이름난 관광지로 변신했다. 인근 수역은 1894년 청·일 전쟁 때 「황해해전」 전적지로 청나라의 「북양함대(北洋艦隊)」가 궤멸한 곳이다.

섬 북쪽의 가파른 절벽 아래 선착장에 내려 잡목 우거진 산등성을 구불구불 넘어가면 남향 평지에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뒤 야산 중턱 비각 안에 모문룡이 세운 「신건망해사비(新建望海寺碑)」가 있다. 현존 유일한 모문룡의 유적이다. 1628년 「망해사」를 세울 때 만든 것으로 비의 높이 158㎝, 너비 66㎝, 두께 16㎝, 앞면은 정자(正字)로 쓴 한문 11줄 282자, 뒷면은 인명 397명, 그중 118명이 모문룡과 부하들의 관등성명이다. 문화혁명 때 돌다리로 둔갑했다가 되살아 난 것이다. 「법륜상전(法輪常轉)」이라 새긴 머릿돌은 떨어져나가 비각 바닥에 굴러있다. 나는 늦가을 썰렁한 황해의 갯바람 속에서 비석을 마냥 쳐다보면서 한나절 먼 옛날로 「시간 여행」의 길을 떠났다.

스청다오, 창산다오(長山島), 광루다오는 랴오닝(遼寧)성 창하이(長海)현에 속하며 현 청은 다창산다오(大長山島)에 있다. 그러나 이 세 섬은 이례적으로 외국인 출입을 통제하는 이른바 「미개방 지역」이다. 스청다오는 좡허(庄河)시에서 8해리, 연안도서 중 육지와 가장 가까워 손에 잡힐 듯한 섬이다. 홍익한보다 1년 전 이곳을 지난 조 집이 『이른 저녁 뭍에서 난민이 횃불을 올리면 섬에서도 맞받아 올린 후 다음 날 배로 데려온다』고 한 대목이 매우 실감난다. 크기는 육안으로도 다루다오의 서너 곱 되는 것 같고, 스청산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축성한 듯 한 당나라 석성(石城)이 있어 앞으로 보존, 개발할 계획이다. 나는 좡허시 교외의 그야말로 엉성한 다라야오(打拉腰)라는 노천 선착장에서 사람과 온갖 잡동사니를 실은 똑딱선을 타고 섬에 들어갔으나 여관에서 「공안(公安·경찰)」에 저지되어 퇴거 요청을 받고 이틀 뒤에 섬에서 나왔다.

광루다오에서 홍익한은 진저우에서 피난 온 선비 이 암(李 암)이 차린 술집에 머물면서 밤이면 책을 읽는 그의 인품에 감동되어 시 한 수를 적어 보냈다.

「부초(浮草)처럼 자그마한 이 외딴 섬에/ 그대는 언제 오셨소/ 지금은 술을 팔아 생활하지만/ 예전엔 어엿한 선비였으니/ 낮에는 술상 보느라 개미같이 일하고/ 밤에는 호롱불에 글 읽고 있네/ 고향 땅 바라보고 울고 계시군/ 언젠가 그 못된 오랑캐 망할 날이 있겠지」.

/박태근

명지대 및 LG연암문고 협찬

■ 가도 주둔 明장수 모문룡은 누구

모문룡(毛文龍)은 17세기 전반 명·청이 교체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전환기에 나타난 「역사의 기형아」라 할 수 있다. 명은 1621년 선양(瀋陽), 랴오양(遼陽), 1622년 광닝(廣寧) 등 요지를 청에게 빼앗겨 동북 지역에서 전면 철수하게 된다. 이때 모문룡은 조선 땅인 가도(가島)에 본영을 두고 겨우 랴오둥 반도의 연안 도서를 발판으로 대청(對淸) 반공(反攻) 작전을 폈다. 그는 하급장교인 도사(都司)에서 이례적으로 3년여 만에 군의 최고 계급인 좌도독(左都督·정1품) 총병관(總兵官)으로 벼락 출세한 후 1629년 상급자인 원숭환(袁崇渙)에게 참형당한다. 광해군은 조선 역내에서 전개되는 모문룡의 군사활동 때문에 조선이 명·청 전쟁에 말려들 것을 우려해 그에게 협력하지 않고 항상 견제해왔다.

한편 인조는 명분론과 자신의 왕권을 승인받기 위한 실리론에서 모문룡에게 이상(異常) 접근한 것이다. 인조와 모문룡의 밀월은 매우 짧아 이덕형, 홍익한 사행이 아직도 베이징(北京)에 체류하고 있는 1624년 12월 벌써 조선 정부에서 「모문룡 토벌론」이 나올 정도였다. 외교통인 이정구는 모문룡이 오랑캐 6명을 죽이고도 6만 명을 죽인 것으로 허세를 부린다고 했다.

인조도 반정 초기에는 명의 책봉 때문에 모문룡의 덕을 좀 봤지만 이내 『모문룡은 짐승이다』 할 정도로 진저리를 냈다. 모문룡은 1621년부터 1629년까지 8년 동안 조선 땅에서 군사활동을 펴,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그의 군사적 역할은 랴오둥 지방을 탈출한 자국의 난민수용과 청의 후방을 때때로 교란한 것 뿐이다. 전의(戰意)와 전력(戰力)이 없는 그의 군단은 전략적으로 쓸모가 없었고 오히려 막대한 전비(戰費)만 낭비해 명 정부에 재정 부담만 안겨줬을 뿐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