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한중합작 막바지 촬영브라스 밴드가 연주하는 스윙 재즈풍의 하바네라. 1920년대 상하이(上海) 클럽 가르시아홀의 최고 가수이자 무희인 가네코(예지원). 이념의 전시장이었던 당시 상하이에는 그만큼이나 많은 인종이 모여들었다. 중국, 일본, 유럽, 조선의 신사 숙녀들 앞에서 그녀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있다. 그곳에는 의열단에 가입한 막내 상구(김인권)를 위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의 파티가 열리고 있다. 여전히 상투를 틀고 있는 돌석(이범수), 금욕주의자인 맏형 한명곤(김상중) 등 모두 그녀에게 매혹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가 「미쳐가면서」 사랑한 세르게이(장동건)만은 무심한 눈길이다. 허무주의자의 건조한 눈길은 그녀를 갉아먹었고, 그의 친구인 이근(정준호)의 사랑도 그녀를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엇갈리기만 하는 이들의 사랑은 나라를 잃고 이국 땅에서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부르짖던 청년들의 운명 만큼이나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1920년대 의열단(義烈團)에서 활동한 5명의 테러리스트의 이야기인 실질적인 1호 한·중 합작 영화 「아나키스트」가 상하이에서 막바지 촬영에 돌입했다. 8~13일 화평반점 8층을 전세내 「가르시아홀」 장면을 촬영중이다. 화평반점은 1929년 문을 연 상하이 최고의 호텔로 개관 이후 처음으로 영업을 중단하고 1920년대 인기클럽이었던 「클럽 가르시아홀」로 변모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조선과 중국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이곳은 술과 노래와 사랑으로 고뇌를 잊으려는 이들로 만원인 속세의 피안. 고딕 양식의 고건물에 1920년대식 무대 배경을 더하니 금세 그 시절의 바로 돌아간다.
70% 촬영을 마친 「아나키스트」는 동양 최대의 오픈 스튜디오인 60만평 규모의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의 처둔(車墩)세트장에서 영화 전체의 60% 촬영이 이뤄지는데 이부분 촬영은 이미 끝났다. 1993년부터 상하이의 주요 프로젝트로 추진되고 있는 상하이필름스튜디오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의 주요 현장을 그대로 복원해냈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영화를 많이 생산해온 중국 영화의 전통은 급조된 세트를 벗어나 좀 더 사실성 높은 촬영장을 원하는 다국적 감독들의 좋은 터전이 되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 첸 카이거의 「화혼」, 얼마전 개봉한 「레드 바이올린」 등 20편의 극영화와 300여편의 TV 시리즈가 이곳에서 제작됐다. 의상 소품 등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배치하는 쩡장부(鄭長符) 예술감독의 지원사격은 영화의 사실성을 한결 높여주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불꽃처럼 살았던 다섯 남자의 이야기』라는 유영식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들의 짧은 생애를 막내 상구의 회상 시점으로 엮어 가는데, 열혈청년들의 짧은 삶을 담다 보니 사랑과 액션, 스펙터클이 적절히 가미돼 흥미진진한 흥행 영화가 될 가능성도 크다. 「아나키스트」는 이달말 현지 촬영이 끝나면 넉넉한 후반작업 기간을 거쳐 5월 5일 개봉한다.
상하이=박은주기자
jupe@hk.co.kr
*영화, 중국서 찍어야 제맛인가
「앙거(安定·조용히)」 「위 페이(預備·레디)」 「액션!」
촬영장에는 다국적 언어가 쓰인다. 막바지에 달한 「아나키스트」를 필두로 김혜린의 스테디셀러 만화를 영화화한 김희선 신현준 주연의 「비천무」(감독 김영준)가 상하이에서 600㎞ 떨어진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 세트장에서 촬영중이다. 명과 몽고의 내전에 휘말린 고려말 사신들의 이야기인 「무사」(김성수 감독), KBS의 무협드라마 「무명천자」도 중국 로케이션을 계획중.
중국으로 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나키스트」는 중국 상하이필름스튜디오로부터 엄청난 오픈 세트와 40여명의 현지 스태프, 숙련된 엑스트라를 지원받는 대가로 단지 8억원을 지불했다. 「제작협력」 수준이지만 중국에서는 이것도 「합작」이라고 부른다. 엄청난 세트와 고급인력 활용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이며, 이로 인한 영화의 리얼리티도 기대 이상이라는 것이 제작사인 씨네월드의 설명. 문제도 있다. 언어 소통이 불완전해 진행이 원활하지 못한데다 중국에서 「민감한」 부분에 대해선 삭제도 요구한다. 뻔한 스토리를 「중국」이라는 이국적 풍경으로 커버하려 할 경우 외화낭비라는 비난도 피할 수 없다. /상하이=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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