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마지막날 전격퇴진한 옐친 러시아대통령에 대한 서방언론의 혹독한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한때 민주화 영웅으로 칭송하던 인물에게 바치는 진실한 헌사(獻辭)는 없다. 무능과 독선, 기행과 깜짝쇼, 정실과 부패, 알코올중독과 지병 등 부정적 면모만 보인채 스스로 지명한 후계자 푸틴의 사면조치속으로 도망치듯 물러났다는 평가다. 신년사를 한다고 나타나 전격퇴진을 발표하는 깜짝쇼를 재연한 것까지 「술취한 광대」 답다고 조소한다.■경멸은 경제파탄등 실정(失政)의 결과에 따른 것만이 아니다. 그는 기존질서를 파괴하는데 용감했을 뿐, 창조적 리더십은 전혀 보이지 못했다는 평가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의회를 불법해산하고 선거부정을 일삼았으며, 시장경제를 세운다면서 경제에 무지·무관심했고, 개혁을 외치면서 부정축재에 앞장섰다는 지적이다. 결국 지도자의 자질과 덕목을 전혀 갖지 못해 「위대한 조국」 러시아마저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케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물이 대권을 쥔 것은 권력을 향한 저돌적 야심과 역사의 우연이 결합한 결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는 혁명으로 몰락한 지주집안 출신이면서도 열성적 공산당원으로 출세했다가, 고르바초프 개혁으로 공산지배가 흔들리자 러시아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이어 보수파의 무기력한 쿠데타때 민중의 선두에 나서 영웅으로 부각됐고, 결국 우크라이나등과 담합해 소련해체와 고르비의 실각을 강요함으로써 대권과 크렘린을 장악했다.
■옐친이 「20세기의 위인」 고르바초프를 제치고, 그 고르바초프 개혁의 최대 수혜자가 된 역사의 아이러니는 러시아에 비극이 됐다. 그가 충성스런 KGB 출신을 후계자로 만든 것도 나라와 민족보다는 오직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라는 혹평이 따른다. 후계자 푸틴의 대중적 지지를 높이기 위해 무리한 체첸전쟁을 감행하고, 모스크바 연쇄폭탄테러를 조작했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러시아인들이 일찍이 한탄한 비극적 숙명은 이어질 모양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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